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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Aug 07. 2021

국수가 있는 풍경

담장 곁 늙은 나무 그늘, 그 아래 평상 위에는

종일 여름 볕에서 생생한 밭을 매던 사람들이

열무 얼갈이김치 아래 뚝뚝 끊어지는 흰 국수로

퉁퉁 불어 검게 탄 고달픔을 속였다.


세상도 쉽게 속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담장 아래 노란 호박꽃이야 모른 척 할터.

시고 짠 김치 국물로 한 생애처럼 돌돌 만 국수를 먹으면

남은 시간은 김치 국물처럼 희미해질 것이다.


어느 날 저물 무렵 뜻밖에 기억하는 것은

한낮의 땡볕이 쨍쨍 내려쬐던 여름이 질펀해

시퍼렇게 익어가던 것들은 온몸으로 푸지게 몸을 비틀어

제 자리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일.


느낌표 같은 비나 진창 왔으면 하던 세월과

올챙이처럼 배나 한번 오지게 불렀으면 했던 시간에도

국수는 여전히 햇볕에 잘 말라가던 것을

담벼락을 꽉 붙든 노란 수세미꽃과 흰 박꽃이 함께 보던

환한 여름 풍경이나 진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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