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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Dec 08. 2020

사랑의 행로에서 마시는 포도주 한 잔

-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파울로 코엘료


길고 긴 쓸쓸한 서정시처럼



한 편의 책 제목이, 한 편의 시 같은 글을 본다는 것은 처음부터 설렌다.

이 책은 아주 길고 긴 쓸쓸한 서정시 같다.


그 쓸쓸함은, 아주 오래 전의 한 친구가 문득 떠오르기 때문이다.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친구는 성당을 다니던 중에 신부수업을 받던 한 남자를 만났다. 친구가 그를 우리들에게 인사시켰을 때 필라의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처럼 위태로웠다. 그는 결국 신부가 되는 길을 택했고, 아마 피에트라 강가 같은 어느 느린 강가에서 내 친구도 그때 필라처럼 울었을 것이다.  

친구의 슬픈 사랑은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작품처럼 인간의 사랑을 통해 신의 사랑을 구현하고 있을까.

 

'모든 사랑이야기는 닮아 있다'란 구절처럼.    



  

이 책은 시간은 토요일에 시작해서 금요일에 끝난다. 단 일주일간의 사랑이 전 생애의 사랑이 된다. 물론 두 주인공은 첫사랑이다. 사랑의 시간이나 그 기간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첫사랑도, 그리고 잊지 않고 다시 만나서 시작된 사랑도 결국은 존재의 의미를 찾는 길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받을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에 이미 '나'란 서술자가 들어있듯이 작품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몫은 필라다. 구도의 길을 걷는 그가 아니다. 그래서 필라가 일주일 동안 그와의 사랑을 갈등하는 동안 마시는 포도주는 의미심장하고 그 포도주를 담은 잔은 특별하다.

  

기독교에서 포도주의 의미는 사전적으로, 수난하기 전날 제자들과의 저녁자리에서 빵은 자신의 몸이고, 포도주는 자신의 보혈이라고 선언한 예수 전승의 내용에 따라 예수의 거룩한 몸과 보혈이다. 포도주는, 신학적으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이요, 역사적으로는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성전의 결탁에 의한 사회적 타살인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상징이다.  


포도주는 먼저 둘째 날 필라와 그가 사랑에 대한 토론을 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여러 병의 포도주가 놓여 있던 대화 속에서 필라는 자신의 사랑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날 필라는 혼자 남게 되고, 이후 두 사람이 이별하게 되는 포도주 잔 깨기의 복선으로 남는다.

 

필라와 그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늘 포도주가 사이에 있다. 그리고 안개가 있다. 안개는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이 어두울 것이라는 걸 예견한다.  

필라는 그와 만난 후 사흘간 마신 술이 지난해에 마신 술 전부를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한다. 물론 그 술은 포도주다. 예수의 보혈처럼 핏빛의 술이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현실의 답답한 현상을 잊으려고 하거나, 현실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필라에게 포도주는 안개에 둘러싸인 현실의 사랑에 대해 확고한 신념이 없을 때 의지하는 대상이다.

  이후 필라는 이 포도주가 담긴 잔을 그에게 깨뜨리라고 요구한다. 그는 잠시 망설이지만 필라의 요구에 부응하듯 잔을 테이블에서 떨어뜨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포도주잔처럼 깨어지는 인간의 사랑을 나눈다.  


  그들이 함께 간 곳에서 동굴을 통과하며 필라는 그를 자유롭게 놔두길, 그러나 자신은 영원히 피에트라 강가에서 울고 있을 수밖에 없는 길을 택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어두운 동굴을 통과한다. 어머니의 자궁을 통과해서, 자궁 속 양수 즉 동굴 속 물을 통과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필라는 이 동굴을 지나고 폭포수를 거치며 자신의 번민을 놓아버리는 동시에, 자신의 번민을 또 새로이 가진다. 역설적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직도 강가에서 울고 있는 사랑을 본 적 있을까



필라의 시선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흔한 갈등과 부딪힐 뻔했다. 우리 개개인이 어떻게 우리의 존재 너머, 초월자를 상대할 것인지의 문제를 이제 생각해 본다. 그때까지 그녀는 피에트라 강가에서 울고 있다. 그 정도 슬픔의 눈물이야 얼마든지 허락해도 되지 않겠는가.  

사랑이 변한 것은 없는 셈이다. 필라와 그, 이 각자가 '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포도주잔 깨기는 필라에게 갈등과 번민을 정리하고 결단하게 만드는 상징이었다.  


숱하게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 흔들림에 휘둘리지 않고 똑바로 서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이 작품의 흔들림은 사랑이다. 사랑이야 말로 가장 어지럽게 우리를 흔드는 삶의 조건이다. 이 심각한 흔들림을 겪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삶의 무너짐을 경험해야 한다.


필라와 그는 이 흔들림의 중심에 서 있었고, 포도주를 사이에 두고 갈등한다. 그럴 때 이 포도주는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인 동시에 인간의 영역에 놓이는 잣대였다.

이 작품이 시작하면서 필라가 피에트라 강가에서 울고 있었고, 모든 것은 강바닥에 가라앉아 전설로 남는다고 했다. 잊히는 것이 아니라 전설로 분명히 남는다고 했을 때, 그와 그녀의 사랑은 실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형되었을 뿐이다.


필라가 그를 놓아버리고 얻는 한 마디의 말,


'사랑은 그 자리에 있어요. 변하는 것은 사람들이죠' 


이 말은 필라에게는 사랑의 변형이다.  

처음부터 이 작품은 신의 사랑을 염두에 두고 쓴다. 포도주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신의 피요, 신의 영역이었다. 이 작품이 굳이 첫사랑을 설정한 것은 바로 순수함, 신의 완전무결함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필라가 언제나 피에트라 강의 전설로 자신의 사랑을 돌처럼 강바닥에 놓아둘 때, 사랑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그녀 역시 삶의 구도자가 될 것이므로.

   

파울로 코엘료는 인간의 내면, 즉 자아의 삶의 위치를 끝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작가다. 그러기 위해서 종교와 인간의 감정과 번뇌들 간의 갈등은 철학적 명상의 장치가 된다.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했을 때, 필라의 사랑은 훨씬 가치 있다.     

필라에게서 신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필라가 그를 놓은 것은, 그녀의 사랑의 승리기도 한 셈이다. 필라는 고독과 슬픔을 향수와 추억으로 전환시켰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제 우리는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며 삶의 갈등과 고뇌를 경험할 때, 피에트라 강가에서 울고 있는 필라를 또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필라처럼 포도주를 사이에 두고 안갯속을 헤매거나, 잔 깨기를 경험하면서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이 작품은 그가 필라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필라가 그를 떠나보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은 고귀하게 승화한다. 우리도 어느 강가에서 필라와 같이 울며 지나간 사랑은 하나의 전설로 내버려 두고, 새로운 사랑의 길로 걸어갈 수 있을 용기와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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