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현 Nov 30. 2020

스트레스를 퀵으로 날리는 누텔라 잼

-  <웃음>, 베르나르 베르베르

 

웃음도 폭력이었던 역설



웃음이란 무엇일까. 지금 같은 세상에서 웃음이란 과연 청량제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을 읽다 보면 웃음에 대한 그동안의 소박한 생각에서 벗어난다. 웃음을 직업으로 가진 코미디언의 이면에 담긴 폭력은 그래서 매우 역설적이다.


여주인공 뤼크레스는 당대 최고의 코미디의 제왕, 다리우스가 웃다가 죽었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취재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누텔라 잼을 먹는다.       

우리 집 아이들도 이 누텔라를 빵에 발라먹는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스트레스 쌓일 때 최고라고 한다.





누텔라 잼은 헤이즐넛 초콜릿 잼이다. 여기엔 저지방 코코아 가루가 들어간다고 하지만 고열량 잼으로 둔갑한다.

코코아 가루는 초콜릿을 만드는 재료로, 아즈텍의 음식문화에서 신의 음식이라고 불렸다.

스페인에서는 초콜릿을 강력한 최음제로 여겨 그 요리법의 비결을 한 세기가 넘도록 비밀에 부쳤다. 2차 대전 때, 물자가 풍부했던 미국은 초콜릿 사탕을 전쟁터의 미군들에게 배급하기까지 했으니 초콜릿의 역사는 앞으로도 무한히 뻗어갈 것이다.

대학 입시인 수능시험을 앞두고 주는 초콜릿 선물은 바로 스트레스에 특효약이라는 생각에서다.  


뤼크레스는 사건을 쫓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허약해졌다고 생각하고, 자살 충동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떤 생존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지 궁리한다. 그것이 바로 누텔라를 빵에 듬뿍 발라먹기였다. 그녀는 범인을 잡아야 하는 스트레스가 쌓일 때, 또 그녀의 집이 범죄자들이 저지른 방화로 다 타버렸을 때도 ‘부드럽고 달콤한 스프레드를 새끼손가락으로 찍어’ 누텔라를 먹는다.  


사건을 함께 취재하는 기자 이지도르가 식당에서 녹차를 주문해 마시는 중에도, 뤼크레스는 누텔라 크레이프를 아침 식사용으로 주문해서 먹는다. 그래도 그녀는 날씬한 미모의 여주인공으로 나온다.

솔직히 소설 속에서나 가능하지, 뤼크레스처럼 시시때때로 누텔라를 먹다가는 금세 뚱보가 되기 십상일 것이다.  

  

누텔라 잼을 손가락으로 찍어먹어야 하는 뤼크레스에게 아마 이 초콜릿에 함유된 코코아 기름이 피부 보습을 도와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펜실베이니아의 허시 타운의 허시 호텔에는 코코아 거품목욕, 퐁듀 랩, 코코아 빈 스크럽 등을 즐기는 초콜릿 스파도 있다고 하니.  


웃음과 관련된 살인을 뒤쫓고, 웃음 관련 살인게임에까지 참여하면서 사건에 점점 깊이 들어가는 뤼크레스에게 웃음은 역설적으로 스트레스가 된다. 우리가 웃으면 복이 온다느니,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말은 뤼크레스에게는 얼토당토않은 속설이 될 뿐이다. 그녀 오직 스트레스는 누텔라 잼으로  정도로 웃음은  그대로 폭력이었다.

       



웃음의 미학적 사유



웃음이란 오로지 인간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학자들은 믿는다.  

이 책에서 웃음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웃음의 살인 경기와 웃음의 근원을 찾으려는 집단 간의 갈등으로 인한 학살이 저변에 깔리면서 매우 아이러니한 웃음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웃음의 시원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 다소 황당하고 과장된 구성으로 이루어졌지만, 군데군데 웃음에 대한 이야기를 집어넣어 책을 읽다 말고 잠시 웃을 여유도 생긴다. 그래서 잘 읽힌다.  


우리의 전통 문학인 사설시조나 탈춤, 판소리 사설 등도 해학었다. 현실의 어려움을 웃음으로 넘기려 했다고 믿는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코미디언들을 웃음치료사라고 간주했듯이, 우리도 현실의 어려움을 해학으로 잠시 잊으려고 했다. 그런데 과연 웃음이 현실을 치료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 순간적인 망각의 순기능 정도는 했을 웃음은 그 빈도수가 점점 많아질 때 현실의 치유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그럴 때 많이 웃는다는 것은 오히려 많은 한이 축적된 역설의 신호기제보여 서늘하다. 그와 자조가 때로 한 끗 차이로 느껴지듯 비애롭다.


웃음에는 결국 어느 정도의 폭력이 존재했다. 그 폭력은 풍자로 불리면서 해학이라는 옷을 입고 상대방을 은연중에 야유하고 비튼다. 그 폭력은 상대방을 해치지 못하지만, 현실에서 똑같이 악해지지 않으려는 방어기제로는 충분했다. 그만큼 우리 문학 속 웃음은 순박했다.


베르베르의 작품에서 웃음은 그러나 폭력적이다. 그걸 깨달으면서 뤼크레스는 누텔라 잼을 먹어댄다.

초콜릿이 신경 안정과 피로 해소에 도움이 된다니 뤼크레스가 누텔라 잼을 흡입하는 것은 살인사건의 강박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저렴한 우울증 치료법은 웃음이다. 이 책이 웃음 뒤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더라도 웃음은 그 효과를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이, 즐겁고 유쾌한 삶의 즉흥적 장치인 것은 틀림없다.

웃음을 전달하는 코미디언의 죽음으로 매우 역설적인 상상력을 던지며, 웃음에 대한 연속성을 전달하려고 작가는 많은 자료와 웃음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하지만 폭력적 현실의 방어기제로 웃음을 선택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프로이트에 와서 무의식에서 폭발하는 그 웃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폭력을 웃음의 순기능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을 때 아직 현실은 비극적이다.  

그래도 뤼크레스의 누텔라 잼을 먹을 생각은 없다. 그냥 웃겠다. 김상용이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했듯이.

 

이 책의 남자 주인공격인 이지도르가, ‘우리가 웃는 까닭은 현실을 초월하기 위함이에요.’라고 했을 때, 동서양의 책 속에서 웃음은 일맥상통한다.


미국의 공포 스릴러 소설가인 스티븐 킹조차


‘웃음은 거부할 수 없다. 웃음이 올 때는 당신은 가장 아끼는 의자에 털썩 앉아 웃고 싶은 만큼 머문다.’


라고 했다.


결국 웃음은 현실에서 잠시 철퍼덕 주저앉고 싶을 때, 의자처럼 잠시 쉬어가는 장치인 셈이다.  

지금 힘들고 지친다면 잠시 쉬면서 웃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단전에 힘이 들어가도록 힘껏 웃고 나면 또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설령 풍자로 덮은 웃음이더라도.


그런데 누텔라 잼도 같이 먹으라는 이야기는 차마 못하겠다. 열량이 감당이 안될 테니까. 그냥 꿀물을 탄 차를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겠다. 니면 달콤 쌉싸름한 다크 초콜릿 한 조각.


베르나르 베르베르 <웃음>, 이세욱 역, 열린 책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몸을 위로하는 희망의 밥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