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영국과 풋귤과 와인
제주 토박이 어린이였던 내가 한반도의 ‘육지’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은 한국 청소년 연맹 아람단 여행을 하면서였다. 청조끼에 청치마, 나무 모양 로고가 새겨진 청 베레모를 쓰고 제주공항에서 대망의 풋풋한 여정을 시작했더랬다. 어렸을 때 엄마는 나의 목이 유독 짧다며, 목을 더 짧아 보이게 하는 옷깃이 있는 셔츠를 사주지 않으셨다. 청남방은 특히 내 얼굴에 맞지 않는다며 절대 사주지 않으셨는데, 아람단 활동 덕분에 청남방과 청치마를 이유 있는 반항아처럼 원 없이 입어볼 수 있었다. 그 당시 간호사복 느낌의 갈색 걸스카우트 단복은 왠지 내 옷 같아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부산 김해공항에 도착해 관광버스를 타고 경주와 담양, 남원 등 육지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어린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석가탑과 소쇄원이 아니라, 고속도로 곳곳에 있는 터널과 맨살을 드러낸 채 깎여있는 산이었다. 버스가 터널 안으로 들어가 실내가 어두컴컴해지면 아이들은 ‘우와!’, ‘이야!’하고 소리치기도 하고 누군가를 몰래 어둠 속에서 때리며 장난을 치곤 했다. 그 당시 제주도에는 터널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나에게도 ‘터널 통과하기’는 신기한 롤러코스터였다. 1990년대 중반, 제주에는 제주 해안가를 감싸는 일주도로, 내륙지역으로는 동부산업도로와 서부산업도로가 있었고, 한라산을 넘나드는 5.16도로와 제2횡단도로가 있었다. 모두 꼬불꼬불한 2차선의 도로였고 지형을 있는 그대로 흠뻑 느낄 수 있는 길이라,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나는 유독 차멀미로 고생을 많이 했었다.
그런 제주 길에만 익숙하던 나에게 산을 관통하는 터널, 언덕을 잘라 속살을 다 내보이고 있는 산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어떻게 조금 더 빨리 가겠다고 산을 뚫을 수가 있지, 자를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을 연거푸 했고, 속살을 드러낸 가파른 언덕에 간신히 심어진 얇디얇은 나무가 마치 내일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아 불쌍하게 느껴졌다. ‘육지에서는 물을 사 먹는다’더라는 말은 여행 중 곧 내 현실이 되었고, 일주일 내내 숙소 옆 슈퍼에서 ‘석수’라는 물을 사 먹었지만,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날이 더우면 학교 운동장 음수대로 달려가 수도꼭지에 입을 꽉 갖다 대고는 공짜 삼다수를 콸콸 마시던 나에게는 가히 육지 문화충격이었다.
그랬던 내가 대학교에서 영화를 배우겠다고 몇 년 후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풋내기 서울러였던 나를 불러 고기를 사주셨던 서귀포 외삼촌은 서울에 내리는 비는 깨끗하지 않다며, 제주에 살 때처럼 비 맞고 다니지 말고 서울에서는 꼭 우산을 챙겨 쓰라고 조언하셨다. 그리고 물냉면을 먹을 때는 구워진 갈비를 면 위에 얹어 먹는 거라고도 하셨다. 지금도 냉면에 고기를 곁들여 먹을 때면 돌아가신 서귀포 외삼촌이 생각난다. 대학 생활을 하며 제주도의 바다가 무척 그리웠지만 바다처럼 드넓은 한강을 바라보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그나마 달랬던 것 같다.
서울 생활이 조금 익숙해지면서 대학교 동네를 벗어나 나의 서울 생활 반경을 넓히던 때, 버스를 타고 남산터널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터널에 들어서자,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버스의 창문을 탁! 탁! 서둘러 닫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내 ‘아, 공기가 좋지 않아서 창문을 닫는구나!'하고 알아채고는 나도 같이 ‘탁’하고 닫았더랬다. 터널을 통과하며 내게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한 나라의 수도에 있는 이렇게도 중요한 산에 터널을 뚫을 수가 있지?’였다. 그것도 세 개나.
이 질문은 런던의 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 야생 공원 근처에 살며 런던필름스쿨 대학원 과정을 밟던 풋풋한 런더너 시절에도 자주 되새기곤 했다. 집에서 걸어서 3분 거리라 영화 시나리오를 쓰다 막히면 산책을 하거나 친구들과 와인 한 병씩 사 들고 만나 잔디에 드러누워 햇빛을 즐기던, 아주 편하게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던 동네의 큰 공원이었다. 언덕배기에서 런던 시내를 다 내려다볼 수 있고 고목이 가득한 시내에 있는 삼림지대라 여럿 공포, 스파이 영화와 <노팅힐(Notting Hill)>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여의도 면적에 맞먹는 오래되고 울창한 삼림을 고무장화를 신고 걷고 있노라면, 150여 년 전 런던 도시 개발로 공원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공원 보전 캠페인을 펼쳤던 오픈 스페이스 소사이어티(Open Spaces Society)와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 회원들의 노력이 그토록 감사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공원을 거닐며 나도 무언가, 자그마한 무엇인가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제주도에서 귤을 수확하던 어느 겨울, 부모님은 크기가 너무 작거나 커서 상품성이 없는 비상품 귤을 과수원 한쪽에 쌓아서, 버리고 계셨다. 도통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나의 표정에 어머니는 제주도 비상품 귤의 생산량이 너무 많아 협동조합에서도 이제는 주스용, 가공용으로 사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Jamie Oliver)가 '웡키(Wonky: Fruit & Veg)’ 브랜드를 영국의 마트와 같이 만들어 못난이 과일과 채소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고, 나도 사 먹는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제주에서는 좋은 뜻으로 비상품 귤을 푸드뱅크에 기증하더라도 행여나 욕을 먹을 분위기라며 한국과 영국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고 하셨다.
타향살이 20년 동안 제주는 자주 오고 갔지만 머무는 기간은 항상 짧고 아쉬웠었다. 2020년, 나는 그동안 제대로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던 우리 못난이 귤과 청귤을 지긋이 바라보게 되었다. 코로나19가 나에게 준 어떤 닫힘과 정지에서 나온 여유의 선물이었다. 2020년 가을, 나는 우리 과수원에서 버려지는 청귤로 청귤술을 담가 보았다. 과실용 담금주를 사서 청귤을 얇게 썰어 담가 일 년 내내 가족과 화이트 와인처럼 마시고 지인에게 결혼선물로도 주었더랬다.
2021년에는 청귤로 발효주인 청귤 와인을 만들었는데, 몸에 좋은 성분이 많다는 청귤 껍질까지 같이 발효조에 넣었다가 아주 풋풋 쓴 와인을 탄생시키고 말았다. 올해에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와인을 만들 포부를 품고 있기에, 제주에서 농촌지도사로 일하는 오빠에게 여러 전문 자료를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었더랬다. 그런데 받아본 모든 문서에 모두 ‘풋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오빠에게 물었다.
“그래서 청귤이야 풋귤이야?”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공식적으로 풋귤이야’였다.
풋! 그동안 풋내기 와인메이커인 내가 사용했던 청귤이라는 표현을 애써 모두 풋귤로 바꿔야만 했다. 그리고 그동안 내 입과 목에 착 달라붙어 버린 ‘청’을 떼어내기 위해 요즘 부단히 풋! 풋! 풋! 애쓰는 중이다.
© 글, 사진 최정은 @greentangerine_jeju
이 글은 2022 영등포문화재단 술술센터 예술과 기술을 잇는 '누구나술술'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soolsool_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