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영국과 풋귤과 와인
2019년 가을 그리스의 한 소도시. 나는 멋진 이름을 가진 도시, 드라마(Drama)의 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주문하고 있었다.
“하우스 와인 레드로 두 잔 주세요.”
“Unprofessional wine인데 괜찮으세요?"
중년의 그리스인 웨이터가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며 우리에게 물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런더너 친구 P와 나는 웃음을 참고 눈을 마주치며 서로의 생각을 묻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끄덕였고, 프로페셔널하지 않다는 와인을 마셔보기로 했다.
“네,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와인 두 잔 주세요.”
웨이터의 엉덩이가 저만치 멀어져 가자 우리는 앞다투어 웃음 짓던 입을 떼었다.
“와인이 프로페셔널하지 않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고급 와인만 프로페셔널하다는 건가? 뭐지?”
우리는 그리스 북동부에서 매년 열리는 ‘드라마 국제단편영화제(Dram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참석 차 테살로니키 옆 소도시인 드라마에 머물고 있었다. 그 당시 친구 P와 같이 작업하고 있었던 나의 단편영화 프로젝트 <도거랜드(Doggerland)>를 피칭하기 위해서였다. 웨이터는 이내 우리가 앉아있는 베이지색 파라솔 밑의 노천 테이블로 돌아와, 스칼렛 빛깔의 얇은 알루미늄 와인잔 두 개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우리는 로마인들이 와인을 마셨을 법한 손잡이가 달린 잔 안에 담긴 미지의 와인을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친구 P의 눈썹이 파라솔 꼭대기를 향해 삐쭉 올라가기 시작했다.
“괜찮은데?” (다시 한 모금)
“Unprofessional wine 아닌데… 프로페셔널한데.”
우리는 한 모금, 다시 한 모금을 마시며, 한잔을 훌쩍 해치웠다. 그날 후, 피칭을 연습하고 난 후에도, 공식 피칭을 친구 P가 아주 작렬하게 망친 날에도 우리는 그 레스토랑을 줄곧 찾아 그 와인을 마셨더랬다. 친구 P는 드라마에서 머물던 마지막 날, 그 스칼렛 빛 알루미늄 와인잔을 레스토랑에 가 팔라고 졸라 런던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드라마를 갔다 오고 난 후 한참 뒤, 나는 도대체 프로페셔널하지 않다는 그들의 와인에 대해 찾아보며 조금이나마 그들의 와인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그 어떤 민족보다도 와인을 먼저 담갔을 그리스 사람들이다. 식사를 하며 와인을 곁들여 즐겨마시는 그들은 와인을 병, 배럴, 큰 용기에 보관한다고 하는데, 와인을 좀 마신다는 사람들은 술집에서 킬로로 주문을 할 정도라고 한다. 레스토랑 자체에서 와인을 만드는 곳도 있고, 아니면 양조장에서 만든 와인을 배럴 혹은 큰 용기로 사는 레스토랑도 있으며, 히마라고 불리는 홈메이드 와인을 팔기도 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아주 큰 용기에 담긴 와인을 통째로 사서 레스토랑 손님에게 카라페(carafe)에 나눠 파는 추세라고도 한다. 상업적으로 브랜드화되어 병에 담긴 와인이 아니라, 누군가가 손수 많이 만들어 귀여운 로마식 잔에 나눠 파는, 그게 내가 드라마에서 마셨던 와인이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안 뒤, 자신들의 와인을 Unprofessional wine이라고 소개했던 겸손한 웨이터를 찾아가 드라마의 와인이 얼마나 드라마틱한지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런던에서 한국의 방송국 유럽지사 촬영일을 하고 있을 때, 300년의 역사를 가진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주류유통회사 ‘베리 브라더스 앤 러드(Berry Bros. & Rudd)의 회장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가 한 수많은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이 와인, 저 와인 다 좋다고 어떻다고 하지만 결국 와인은 ‘발효된 포도 주스(fermented grape juice)’라는 말이었다. 그는 그 말을 한 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간단한 문장을 마음속에서 되새겨 보고 있었다.
“와인은 발효된 포도 주스다”
품종이 어떻고, 어느 년도에 생산되었고, 어느 상을 받았고, 누가 좋다고 홍보하는 떠들썩한 와인시장에서의 허황과 거품을 빼고 기본에 겸손하고 충실하라는 그의 말이, 그리고 드라마에서 맛봤던 참으로 프로페셔널한 와인이 종종 나의 혀를 맴돈다.
© 글, 사진 최정은 @greentangerine_jeju
이 글은 2022 영등포문화재단 술술센터 예술과 기술을 잇는 '누구나술술'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soolsool_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