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영국과 풋귤과 와인
“엄마, 나 좋은 소식 있어요! 돈 되는 일은 아니고요.”
“그럼 어때? 뭔데?”
“영국에 BAFTA라고 있는데 거기 회원이 됐어요. 미국 오스카상 주는 데가 아카데미잖아요. 영국도 그런 아카데미가 있는데 아카데미 정식 회원은 아니고, Connect 멤버라고 유망한 영화인을 3년 동안 지원해주는, 올해 새로 만들어진 회원제예요.
“잘 됐다, 잘 됐다.”
2009년 처음 영국 땅을 밟고 13년 만의 일이었다. BAFTA(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의 문턱은 처음부터 높아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런던 피커딜리에서 그냥 스쳐 지나갈 건물이지만,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그 위엄은 새삼 나라는 사람을 작아 보이게 만들곤 했었다. 영화 관련 콘퍼런스, 상영, 네트워킹 행사에 종종 참여하며 아카데미를 자주 방문했지만, 정회원들이 회원들만의 공간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미팅하는 모습은 저 너머, 마치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얇은 '회원 전용’ 줄이 우리와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지만, 그 줄이 나에게는 마치 단단한 철통 방어막처럼 보였다.
줄 너머 그들만의 공간을 이제는 나의 공간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물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BAFTA가 나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도와주고 싶다는 의사를 보여준 것은 영화인으로서 나의 꿈을 지속하게 하는 데에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물론 진정한 용기야 내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20년 동안 꾸준히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도전은 하고 있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의 인정은 소중하고, 감사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내가 BAFTA에 제출했던 글을 오랜만에 꺼내어 다시 읽어보았다. 깜짝 놀랐다. 그들이 요구한 조건에 맞추어 제출한 나의 대표작 란에는 영화제에서 상 받은 단편영화를 제쳐두고, 대학원에서 하루 만에 찍은 단편과 희곡 단편 영상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영화 투자를 받기가 너무 어렵고 힘들어, 제작비가 덜 드는 ‘희곡으로 한 번 해볼까?’하고 2019년 영국의 한 극단이 운영하는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지원해 참여했었다. 그 결과물로 원래는 런던에서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져야 했을 작품이 코로나 기간 중 극장 인원 규제로 희곡 영상으로 만들어져 상영되었다. 극장 무대에 몇 번 올려지고 사라졌을 작품이 영상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나의 연극 관련 경력이 나의 영화 경력을 도운 것이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산다고 했던가.
풋귤 와인을 만드는 나의 작업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코로나19로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서 고향 제주에서 버려지는 풋귤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전에는 그저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과수원에서 버려지는 아까운 과일이었지만, 기후위기에 대한 나의 영화 시나리오가 영화화되지 못하자, 나는 풋귤로 기후행동을 하기로 나도 모르게 마음을 먹게 된 것 같다.
나는 풋귤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버려져 제주의 땅에 썩어 문드러졌을 풋귤을 가지고 향내 듬뿍 담긴 풋귤 와인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탄소발자국이 큰 수입 와인이 아니라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하지만 버려지는 과일로 와인을 담그는 일이다.
서로 만나 어울리지 못할 것 같았던 나와 영국과 풋귤이 만나 와인으로 빚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도리어 이 와인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나에게 불안을 불러일으켰으며, 나에게 배우라며, 저 줄 너머 내 공간을 만들라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시작한 나의 풋귤 와인 만들기 도전과 와인과의 줄다리기는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스토리가 있는 와인을 만들며 써 내려 간 나의 글은 또 어떤가.
내가 담그는 와인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글을 짓는 일은 내가 빚는 와인의 맛에 향기를 불어넣는 일이었다.
나의 와인과 글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나의 역량을 확장하는 일은 나의 명함에 미리 새겨 놓은 ‘Filmmaker Bookmaker Winemaker’의 꿈에 한걸음 더 가까워져 가는 일이었다. 와인과 나는 그렇게 서서히 연결되어 관계를 맺어가고 있었다. 나의 이 모든 모험이 나와 당신, 우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엄마에게 좋은 소식 있다며 전화했던 그때의 그 두근거림처럼, 언젠가 또다시 와인과 나의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하며 가슴 설레었으면 좋겠다.
© 글, 사진 최정은 @greentangerine_jeju
이 글은 2022 영등포문화재단 술술센터 예술과 기술을 잇는 '누구나술술'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soolsool_center
그린탠저린의 와인 맛이 궁금하신 분은 2022년 11월 16일~26일 서울 문래동 술술센터 ‘누구나술술’ 결과 전시회에서 풋귤 와인을 시음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