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풋귤 와인

나와 영국과 풋귤과 와인

by 최정은


100주년 기념 어린이날. ‘술과 식초’ 수업을 같이 듣던 춘천 사시는 선생님께서 춘천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점심으로 평양 막국수를 먹고 멋들어진 춘천의 문화 공간을 방문한 뒤, 우리는 춘천 닭갈비가 기다리는 선생님 댁으로 향했다. 손수 가꾸신 정원에 술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맥주로 목을 축이던 중, 나는 집에서 챙겨 온 풋귤 와인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작년 2021년 가을에 담근 와인이었다.


“제가 어제 살짝 마셔봤는데, 영 누구한테 선물할 수준도 못 돼요. 식초 맛도 나는 것 같고요. 선생님들 얘기를 듣고 싶어서 가져와 봤어요.”


다들 생각지 못했던 누런빛 와인의 등장에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조심스레 한 모금씩 입술을 적셨다.


정적.


“아황산염 처리하신 거예요?” (고개 끄덕)

“젖산균이 있는 것 같아요. 위생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제가 술은 잘 만들진 못해도 맛은 기가 막히게 잘 알거든요. 근데 이건 오래된 김치에서 나는 맛이에요. 술에서 구린내가 나요.”

“풋귤 껍질 넣었어요?” (고개 끄덕) “에이...”

“나는 잘 모르겠는데, 군맛이 나네요.”

“병은 예쁘네요.”


훌륭한 혀를 가지신 분들이 나의 첫 와인을 두고 칭찬할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지만, 선생님들의 반응은 나에게 조금 충격적이었다.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맛난 춘천 닭갈비를 뒤집으면서도 ‘구린내’, ‘군맛’이란 단어가 내 머리에 맴돌았다.


2021년 여름 포도로 와인을 만들 때, 포도 껍질을 즙에 같이 넣어 와인을 맛있게 잘 만들었었다. 풋귤 껍질에도 좋은 성분이 많다고 하니, 1차 성공에 힘입어 풋귤 껍질까지 다 넣어 풋귤 와인을 만들었더랬다. 그 껍질이 잡맛을 만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위생은 또 어떤가. 위생장갑을 끼고 잘게 썬 풋귤 슬라이스 위에 소량의 아황산염을 뿌려 잡균 소독 처리도 했고, 술 담는 통과 와인병도 모두 열탕 소독을 했다. 다만 마지막 와인을 와인병에 넣을 때 아황산염 처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와인의 맛은 이미 정해지고 난 이후였다.


집에 돌아와 올봄에 귤잼으로 담갔던 와인을 처음으로 냉장고에서 꺼내 마셔봤다. ‘너도 설마 나를 배신할 꺼니?’라는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이었다. 만드는 내내 거품이 많이 올라와 애를 많이 썩였던 녀석이었다. 겨울 바람맞으며 과수원 대형 솥에서 팔팔 끓이고 졸여 만든 잼으로 담근 와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 모금 넘기는데 목이 뜨거워지고 매워지는, 약간은 쓴 듯하면서도, 스파클링 와인처럼 기포를 내뿜는, 따뜻한 겨울 내음을 물씬 풍기는, 나의 심장을 뜨겁게 하는 런던의 크리스마스를 품은 와인이었다. 내가 기대하는 꽃향기나 상쾌한 느낌은 적었지만, 풋귤 와인은 화이트 와인처럼 차갑게 여름에 마시고, 귤 와인은 레드 와인처럼 겨울에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와인이었다. 그런데 내 못난이 2021년 산 풋귤 와인은 왜 그 지경이 되었을까?


‘미스터리’는 일어난 사건이고, ‘스릴러’는 일어날 사건이다.


2022년 다시 풋귤 와인을 담글 준비를 하며 나는 불안했다. 미처 찾지 못한 스릴러 영화의 살인범이 나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 올해는 작년보다 담그는 풋귤 와인의 양도 많고 심지어 문래동 술술센터에서 전시 겸 시음회를 하기로 계획되어 있는 터라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 추석을 보내고 부모님 과수원에서 풋귤을 따서 껍질을 벗겨 대형 착즙기로 착즙을 하고, 10L 생수통 6개에 풋귤즙을 담아 서울로 공수하기로 했다. 풋귤즙이 올라오는 도중 혹시나 상할까 봐 아이스팩과 아이스박스를 단단히 준비하고 계획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효모는 지난겨울 런던 갔을 때 종류별로 사서 나랑 같이 비행기 타고 온 녀석들을 사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나는 ‘술과 식초’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술을 담갔고, 그렇게 며칠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풋귤즙의 당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알코올 발효가 시작되면 효모들이 당을 먹고 알코올로 변하면서 당도가 떨어져야 하는 데도 말이다. 그렇게 불안한 며칠이 또다시 지나갔고, 9월의 마지막 날 우리는 샛노란 풋귤즙 3통을 내려다보며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미스터리 탐정소설의 사건 현장을 방문한 형사들이었다.


각기 다른 효모를 넣은 세 통의 1번과 3번은 발효가 전혀 되지 않고 있었고, 2번은 조금 진행되었지만, 냄새가 그리 좋지 않았다. 풋귤즙은 여전히 달달한 풋귤 주스 상태였다. 작년 위생 상태에 대한 나의 불안 때문에 아황산염 처리가 많이 되어, 효모가 기지개를 켜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풋귤즙에 넣은 아황산염의 무게가 가정용 전자저울의 오차범위보다 작은 것이 문제였을까? 실내 온도가 너무 낮았나? 다시 제주도로 내려가서 새로 풋귤을 따고 즙을 짜서, 다시 서울로 공수해서 와인을 만들어야 하나 등등. 온갖 미스터리 범인들의 얼굴과 '만약에...'가 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처음에는 조금 화도 나고 혼란스러웠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일어난 사건을 앞에 두고 오히려 나는 마음이 차분해져 갔다.


‘미스터리’는 일어난 사건이고, ‘스릴러’는 일어날 사건이다. 미스터리를 해결할 탐정의 등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아황산염이 많이 처리되었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풋귤즙에 산소를 공급하기로 했다. 와인을 마시기 전 와인병과 잔을 흔들 듯, 여전히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휘발성 아황산염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심폐소생술 카드였다. 2번, 3번, 1번 차례로 산소를 공급해주며 효모를 더 넣어주었다. 과연 나의 풋귤즙은 범인의 얼굴을 드러내고 2022년 산 풋귤 와인으로 탄생할 것인가? 아리송송 두둥!






© 글, 사진 최정은 @greentangerine_jeju


이 글은 2022 영등포문화재단 술술센터 예술과 기술을 잇는 '누구나술술'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soolsool_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