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영국과 풋귤과 와인
2015년 혼자가 된 나는 영국에서 싱글로 사는 법을 다시 터득해야 했다. 6년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니, 하루아침에 친구의 수가 반으로 줄었고, 가깝게 지내던 A의 부모님과는 남이 되었으며,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날벼락같은 소식에 나의 심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 쉴 새 없이 바삐 뛰고 있었다. 심장이 팔딱팔딱 내 안에서 뛰다 펑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동네 의원을 예약해 주치의를 찾아갔다. 한동안 나의 심장 소리를 듣던 의사가 말했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기는 하지만 걱정할 수준은 아니에요.”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고요?”
컴퓨터 화면을 보며 나의 사전 진찰 기록을 읽던 의사가 말했다.
“…영국 남자였나요?”
다소 의외의 질문에 멈칫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인도, 방글라데시 혹은 파키스탄 출신의 의사였다. 영국을 사는 같은 소수집단의 사람으로서 마치 내가 겪고 있을 상황과 충격을 머릿속에서 그만의 스토리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포스트잇에 이것저것을 적어 내려가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에요. 마음에 드는 곳에 연락해서 주기적으로 상담받도록 해요. 주치의 소개로 왔다고 얘기하고요.”
나는 런던 해크니(Hackney)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자선단체인 센터 포 베터 헬스(Centre for Better Health)에 등록했고, 주중에 한 번씩 아침에 들러 심리상담사와 만나 이야기했다. 상담 후에는 근처 식당에 가서 영국식 아침 식사를 하고는 옥스퍼드 서커스(Oxford Circus)에 있던 방송국 사무실로 출근했다. 처음에는 상담이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다고 심리상담사인 친구에게 불평하곤 했지만, ‘상담-식사-출근’이라는 나만의 반복적인 의식에 어떤 안도감이 같이 따라오는 것 같았다.
나만의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동안 내가 소홀했던 것,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우선 한국에 있는 가족과 영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더 나의 시간과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했던 한국도 가족 경조사도 챙겨가며 일 년에 두 번씩 가고, 영국 친구들도 내가 먼저 연락해 만나곤 했다. 하지만 A도 나와 같은 런던 해크니에 살고 회사도 나와 같은 옥스퍼드 서커스에 다니다 보니, 그와 그의 새 여자 친구와 출근길 지하철에서 마주치거나 동네 커피숍에서 보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가슴이 다시 답답하고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런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2016년 생일을 맞아 방문했던 작은 해안가 마을 마게이트(Margate)가 떠올랐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 M. W. Turner)가 마게이트의 바다와 하늘 그림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고, 자전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의 고향이며, T. S. 엘리엇(T. S. Elliot)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의 일부를 쓴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요즘 들어서는 런던 해크니의 ‘힙스터’들이 정착하는 곳으로 알음알음 유명세를 탄 곳이다. 방문했던 수많은 영국 도시 중에서 유일하게 ‘여기에서 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노을 지는 마게이트 백사장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해봤었다.
그리고 2017년 3월 마게이트집 월세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2년 넘게 그곳에 살며 마게이트 백사장이 나의 제주 고향 표선 백사장과 매우 많이 닮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고향을 가까이 두고 싶었나 보다', '고향에 살고 싶었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2019년 오빠 결혼식으로 마게이트집을 급하게 비우기 전까지 나는 그곳에서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비로소 ‘싱글 레이디’로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천천히 적응하고 있었다.
2022년 9월 19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을 서울집에서 TV로 시청하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난 나는 2009년 처음 영국에 도착했을 때 영국 왕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10년 동안 영국에 살면서 이 나라를 점점 알아갈수록 영국 왕실이 나를 포함한 일반 시민의 삶에 꽤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차차 알게 되었다. 심지어 영국 국세청의 이름도 HMRC(Her Majesty’s Revenue and Customs)이고 내가 마게이트에서 바라보던 북해의 수많은 풍력발전기도 여왕의 바다 땅 위에 세워졌다고 들었다.
내가 여왕의 존재에 대해 조금 더 가깝게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본 계기는 내가 여왕이 후원자로 있는 영국영화TV자선단체(Film & TV Charity)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부터였다. 2018년 열린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의 방송 감독의 통역/어시스턴트로 일한 적이 있었다. 일한 곳은 한국 평창, 동료는 영국 사람들이었지만 나를 고용한 올림픽방송국(Olympic Broadcasting Services)이 스페인에 소재하다 보니, 나의 불찰로 세금을 영국과 스페인 두 나라에 이중으로 내야 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메일 내용 중에 빨간 글씨가 두텁게 쓰여 있으면 무시하지 말고 유심히 차근히 잘 읽어봐야 한다.
갑작스레 나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졌다. 나의 상황을 자선단체에 설명하고 그동안 나의 영화와 방송 경력을 제출하니, 담당자가 배정이 되었다. 아주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나의 마게이트집에 찾아와서는 나의 여러 가지 상황을 듣고 가셨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집 월세가 주기적으로 통장에 입금되기 시작했다. 자선단체는 영국 왕실 가족이 참여하는 영화 프리미어 상영을 통해 수익을 얻어, 어려움에 처한 영화인과 방송인을 돕고 있었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도 자선단체는 영화인과 방송인을 위해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단체는 스크린 뒤에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땀과 노력을 인정하였고, 그들이 갑작스러운 어려움과 변화에 직면했을 때 포기하지 않고 적응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 여왕, 그녀의 죽음을 통해 무엇보다 나에게 강렬하게 울림을 주는 것은 그녀의 70년 재위 기간 동안 온갖 변화의 풍파 속에서도 그녀가 적응하고 진화했다는 점이다. 그녀의 잘못된 판단과 뒤늦은 행동에 비판이 쇄도할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배워나갔고, 변화했고, 받아들였으며, 세상에 모범을 보였다. 모든 것이 그녀와 그녀의 왕실 가족을 위한 철저한 의도와 기획이라고 할지라도,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녀가 이룬 ‘적응’에는 그 누구도 박수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2020년 코로나19와 함께 시작한 나의 한국살이, 나는 잘 적응하고 있나? 나는 나에게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고 있나? 나는 거듭 진화하고 있나? 영국 여왕의 일생을 되새겨보며 나의 오늘을 마주한다.
© 글, 사진 최정은 @greentangerine_jeju
이 글은 2022 영등포문화재단 술술센터 예술과 기술을 잇는 '누구나술술'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soolsool_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