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 업 코미디

나와 영국과 풋귤과 와인

by 최정은


“지금도 날 사랑해?

“…….”


정확히 2015년 9월 19일 토요일 아침 GMT. 지금은 그 이유를 기억할 수 없지만, 그날 꼭 물어봐야만 했다. 몇 주 전부터 입안에서 맴돌던 그 질문이 비로소 가을의 아침을 맞아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었다. 6년 동안 사귄 A는 갑작스러운 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2009년 처음 영국으로 가 영화제 일을 같이하며 알게 된 A는 나의 모든 영국 생활의 중심이자 조력자이자 무엇보다 생사를 같이한 연인이었다. 2010년 어학연수가 끝날 무렵, 영화 대학원에 원서를 내고 인터뷰를 봐 합격했지만, 제주에 계시는 어머니는 입학을 반대하셨다. 대학 등록금이 많이 부담스러운 것도 있으셨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대학원에 가면 하나 있는 딸을 영국과 영국 남자 A에게 빼앗길 거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아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의 직감은 정확했다.


2010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설득해야만 했다. 서울로 돌아간 내가 런던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A는 많이 불안해했다. 친구 결혼식으로 일본의 봄을 찾은 A를 보러 나는 도쿄 하네다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반나절의 짧은 재회였다. 답례로 그는 여름 장마가 몰아치던 서울로 나를 보러 왔고, 나는 그해 가을 런던필름스쿨 대학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5년 뒤, 그 갑작스러운 질문을 한 저녁, 우리는 스튜어트 리(Stewart Lee)의 스탠드 업 코미디 공연을 보러 갈 계획이었다. BBC에 나온 그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낄낄거리며 웃던 나를 위해 A는 9개월 전에 표를 예매했었더랬다. 런던 공연은 이미 모두 매진이라 켄트주(Kent)에 있는 세븐옥스(Sevenoaks) 공연 표를 사야 할 만큼 스튜어트 리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 오늘 공연 굳이 가지 않아도 돼.”


A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를 사랑했던 과거의 A는 나를 위해 오늘 공연 표를 샀고,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현재의 A는 공연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


나는 며칠 전에 들뜬 마음으로 열차표를 샀던 나의 행복을 그가 짓밟도록 놔둘 수가 없었다. 아니, 나는 연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랑이 아직도 여전히 견고하다고. 네가 틀렸다고. 과거의 네가 맞다고. 우리가 같이 보낸 6년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나는 세븐옥스 코미디 공연에 가자고 했고, 그날 늦은 오후 우리는 기차역으로 향하는 런던 이층 버스에 올라탔다.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자기 일처럼 내 단편영화의 촬영을 도왔던 A. 한국 사람인 나를 영국에서 영국 사람처럼 살게 해 줬던 A. 런던에 오셔서는 A와는 절대 결혼해서는 안된다던 부모님. 병원 수술대에 두 번이나 오른 A. 영국 비자 신청으로 마음고생이 많았던 나날들. 자전거 사고로 병원 응급실에서 한참만에 깨어나신 A의 아버지. 이제 우리의 생활과 일이 그나마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버스 안에서 엉킨 실타래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숨을 쉬기 어려웠다. 버스의 창문을 열었지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기차역을 향해 금융가가 모여있는 캐논 스트리트(Cannon Street)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나는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내 몸속에서 엉켜버린 실과 공기를 뱉어내야만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A는 나의 몸을 붙잡으며 나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내 안의 엉킨 실타래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조그마한 동양 여자가 런던 금융가의 중심,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풍경은 그다지 흔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열차를 타고 세븐옥스에 도착했고, 내가 그리도 깔깔대며 좋아했던, ‘얘 도대체 누구야?’ 하고 물어봤던 스튜어트 리의 스탠드 업 공연장에 드디어 입성할 수 있었다. 단 몇 시간 전만 해도 울며 불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내가 공연을 보면서 다시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남자를 옆에 두고, 스튜어트 리의 코미디를 같이 큭큭거리며 보고 듣고 웃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우스운 날을 함께 보내며 아주 천천히 헤어지고 있었다.






© 글, 사진 최정은 @greentangerine_jeju


이 글은 2022 영등포문화재단 술술센터 예술과 기술을 잇는 '누구나술술'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soolsool_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