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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서가 Oct 27. 2022

사랑, 결혼, 인생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끈>을 읽고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했었나 싶어. 사랑은 커다란 용기 같아서 우리는 그 안에 뭐든 다 집어넣어 버리지. (p.220)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끈>은 '반다와 알도' 노부부의 이야기며 한 가족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세 챕터로 나뉘어 있다. 1권은 아내 반다가 알도에게 보냈던 분노와 상실감이 가득한 과거의 편지들을 보여주고 2권은 알도가 직접 이야기한다. 3권은 딸이 이야기하는데 끝으로 갈수록 퍼즐이 맞춰지게 된다. 앞부분은 사랑이나 부부관계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자세로 읽게 된다. 나는 사랑이나 결혼의 환상을 잃고 싶지 않다. 이 말은 곧 그 이면의 허무함과 부질없음을 알기 때문에 남아있는 작은 환상이나마 꽉 붙잡고 싶을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쉽게 회의적이 되는 거다. 알도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한 인간의 심리가 리얼하게 그려진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알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하나의 개인이길 갈망하게 되는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과의 사랑, 열정 그 새로운 에너지가 얼마나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지. 사랑에 빠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봤다. 죄책감에 괴로우면서도 회피하는 이기적인 마음, 성별을 떠나 인간으로서 이해가 될 법했고 어떤 부분은 아주 궤변 같았고, 또 어떤 부분은 너무도 찌질한 자기변명 같아서 이 모든 것이 너무도 리얼했다. 그래서 이 책은 별나다. 너무 이해만 된다면 나라는 사람이 별로인 게 되는 것 같고, 너무 이해가 안 돼도 이 책은 유해하기만 한 쓸모없는 책이 되니까.⠀


비가 내리는 것과 똑같아. 빗방울 하나하나가 우연히 부딪혀 결국에는 작은 도랑이 만들어지지. 첫 만남의 호기심을 깊이 파고들면 호기심이 이끌림이 되고 이끌림이 커져서 결국은 섹스까지 하게 되는 거야. 한 번 섹스를 하면 또 하게 되고 반복은 필요와 습관으로 이어지지. (p.219)


아내와 아이들에게 상처는 상처대로 주고, 그렇다고 끝까지 외면하지도 못한 채 아이와의 한 추억(제목처럼 끈과 관련된, 그렇지만 조작된)에 이끌려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채로 어정쩡하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 눈치나 보면서 죽은 듯이 살고 있는 '알도', 그리고 복수심에 알도를 다시 받아들이고 매사에 날카롭고 예민하게, 비타협적으로 평생을 살아온 '반다', 그리고 그런 부모를 보며 자란 '아이들'의 뒤틀린 상처까지, 어느 하나 정 붙일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하나 이해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완전하지 않으니까.⠀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끈>이라는 제목과 이미지가 참 와닿는다. 자세히는 얘기하지 않겠지만 신발 '끈'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에 알도는 다시 돌아오게 됐다. 표지 그림은 양 발의 끈이 서로 묶여서 마치 제발에 걸려 넘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게 딱 알도의 처지다. 마지막에 딸이 얘기하듯이 알도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고 어쭙잖게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 결과 가족 모두에게 비극이 됐다. 마지막 챕터는 몰랐던 비밀들이 폭로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배신과 기만까지 다소 파괴적인 결말이 휘몰아친다. 진짜 와르르 무너진다.

그저 외도했다가 돌아온 이야기로만 전해질까 우려된다. 한 가정의 위기를 리얼하게 보여준다는 점만으로도 무척 탁월하다고 생각하지만 구조적으로도 탁월하다. 사건으로 궁금증을 일으킨 채 이야기를 끌어가다 마지막에 충격적인 해소까지, 극적인 요소가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다. 줌파 라히리가 직접 영문 번역했다고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 작가가 얼굴 없는 작가로 유명한 엘레나 페란테가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는 점이고 더 재밌는 것은 번역가인 작가의 부인 역시 엘레나 페란테로 지목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데, 외도를 하는 남자가 있는데 하필 그 남자가 글발이 있어서 일기가 기가 막혀. 그게 알도다. 모쪼록 읽으면서 너무 분노하진 말기를.


가끔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았지만 가끔은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나도 반다도 침묵의 기술을 잘 알고 있었다. 결혼 생활의 위기를 겪은 후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이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191)


아빠의 실수는 일단 다른 사람에게 죽을 만큼 깊은 상처를 주거나 아니면 평생 남을 상흔을 남긴 다음에는 절대 되돌아오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거야.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거지.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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