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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닥 Aug 19. 2021

친구년은 약속 시간에 맨날 늦고,

나도 모르게 다리가 달달 떨린다. 이 기집애는 맨날 이렇다. 3시 약속이면 지금 나가야 하는데 아직 젖은 머리에 수건을 말아놓은 채 말릴 생각도 않는다.

“ 니 3시 약속이라고 안 했나?”

“어. 30분이면 간다. 아직 1시간 남아따.”

“뻐스 탈 끄가?”

“어~”

외출복을 고르며 친구가 대답한다.

같이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하기 전에는 몰랐다. 부산에서 중학교 때 만나 친해진 이 친구는 약속 시간에 매번 늦었다. 왜 늦었냐고 하면 늘 버스가 늦게 왔단다. 그냥 그려려니 했다. 도로 사정이 안 좋기로 악명 높은 부산이었다. 버스 20~30분 연착은 대수였고, 몇십 분이나 늦은 뒤엔 같은 번호의 버스가 두 세대 연달아 올 때도 부지기수였다. 도로는 특정한 시간대도 없이 툭하면 막혔다. 그런 곳이었다, 20년 전 부산은. 그래서 늦는 게 일상인 친구였지만 이해했다. 하지만 같이 살아보니 알겠다. 버스나 도로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친구년이었다.


1시간 남았다고 대답을 하다니, 말이 안 된다.

화장 다 하고, 머리 말리고, 옷 갈아입는 데까지 10분 이상 걸린다. 그래 딱 10분 걸린다고 치자! 집 현관문 열고 나가서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데만 5분 걸리고, 버스 기다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5분이다. 10분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전혀 막히지 않는 상황으로 딱 30분 후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고 해도 내려서 약속 장소까지 걸어가는데 또 5분 걸린다. 최단시간으로 잡아도 벌써 50분이다. 지금 나가야 제시간에 도착한다. 하지만 친구는 아직도 뭘 입을까 고민 중이다. 머리는 여전히 젖은 상태다. 그리고 1시간 남은 게 아니라 54분 남았다 친구년아. 시간관념 없는 사람은 이게 문제다. 54분 남은 것을 1시간이라고 퉁친다. 속 터진다.


어릴 때부터 약속 시간에 관한 강박 같은 게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고, 어디서 막힐지 모르는 도로 위에서 나는 늘 조마조마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늦으면 어떡하지? 아놔~30분 더 일찍 나왔어야 했나?... 지하철이라도 타면 제 시간에 도착하겠지만 그 당시 부산은 지하철이 1호선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약속장소로 버스를 타고 갔는데 도로는 2~3호선 지하철 공사로 인해 여기저기 파헤쳐져 가뜩이나 막히는 길이 더 막혔다. 환장한다. 서울에서 살고부턴 지하철만 타고 다녔다. 2~3번 환승해도 상관없었다. 언제 오고, 어디서 막힐지 모르는 버스를 타는 것보다 환승시간까지 계산해서 더 일찍 나가는 것이 마음 편했다. 약속시간보다 10분은 일찍 도착해야 마음이 놓였고, 나보다 더 일찍 도착한 친구를 보면 미안했다. 내가 더 일찍 도착했어야 했는데….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가방 안에 늘 책을 가지고 다녔다. 집에서 책을 읽으나 길거리에 서서 책을 읽으나 나에겐 다를 바 없는 시간이었다. 늦게 왔다고 혼낼 사람도 없었는데 스스로 시간에 조여 살았다. 나는 단 한번도 약속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여유롭게 머리를 말리는 친구에게 잔소리를 한다. 머리 빨리 말려라~화장도 얼른 해라~이거 걸치고 빨리 나가라~늦겠다아아아~~아니 벌써 늦었다 이년아!!! 일찍 도착해서 남들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아깝다는 친구에게 집에서 시간 보내나 밖에서 시간 보내나 같은 것 아니냐, 시간이 왜 아깝다는 거야, 이해를 못 하겠다며 잔소리를 하고 등짝을 백번쯤 후려 친 뒤에 겨우 밖으로 내 보낸다. '제시간에 도착해야 할 텐데… ' 간당간당한 시간에 나간 친구를 걱정하며, 아니 정확히는 늦게 도착할 친구 때문에 기다리게 될 친구의 친구를 걱정하며 혼자 남은 집에서 벌러덩 누워 텔레비전을 켠다. 요즘 가장 핫한 드라마가 재방송된다. 이미 본방사수 한 드라마지만 재밌으니 또 본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해진다. 일해야 하는데…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학습만화를 얼른 그려야 하는데 왠지 하기가 싫다. ‘아직 마감기한이 조금 남아있으니까…’ 마음 한 구석은 불안하지만 내일의 나에게 일을 미룬다. 반쯤 읽다가 구석에 던져둔 책을 가져와 읽기 시작한다. 화장실에 한 권, 방에 한 권, 텔레비전 옆에 한 권.. 나는 책을 여기저기 두고 손에 잡히면 읽곤 했다. 한 권을 진득하게 읽은 적이 없다. 내가 던져둔 책들과 친구가 던져둔 책들로 집꼬라지가 엉망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치워도 친구가 던져 놓는다. 친구가 치워도 내가 던져 놓는다. 집은 늘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나만 맨날 청소할 순 없잖은가. 그렇다고 친구에게 매일 치우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엉망진창인 집에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마음 상태 유지하는 것, 이게 가족 아닌 친구와 살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책을 읽지만 딱히 재미가 없다. 마음 한구석에 곧 다가올 마감이 계속 걱정이다. 뭐라도 그려야 하는데…. 어떤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뭐~마감이 닥치면 하겠지. 여태껏 늘 그랬다. 어찌되었든 마감시간은 지켰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평생 단 한번도 약속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딱히 한 것은 없지만 시간은 잘도 가고 배는 따박따박 고프다. 친구가 만들어놓은 반찬이 있나 냉장고를 뒤져본다. 내 친구는 먹을 것을 뚝딱뚝딱 잘 만들어낸다. 채소를 씻고, 다듬고, 썰고, 지지고, 볶고 하며 꽤 맛있는 한 끼를 차려낸다. 요리 잘하는 그녀가 부럽다. 부럽긴 하지만 내가 요리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요리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귀찮다. 음식은 자고로 남이 만들어준 음식이 최고다. 냉장고를 열어 친구가 만들어 둔 반찬이 있나 봤지만 없다. 아침에 다 먹었나 보다. 흠~그럼 라면을 먹으면 되지! 물을 끓인다. 라면도 남이 만들어준 음식이다. 물만 부으면 끝! 라면에 이것저것 넣어서 먹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것저것이라지만 보통 채소들이다. 콩나물이나 양파나 마늘이나…. 나도 넣어 먹고 싶지만 그거 넣어먹으려면 다 씻어야 하잖아. 아~귀찮아. 세상에서 제일 싫은 짓이다. 채소 씻고 앉아 있는 것. 애당초 채소들을 사 온다는 것 자체가 귀찮은 일이다. 사온 채소를 씻고, 껍질 벗기고, 자르고…. 으~시간 아까워. 그냥 라면에 계란 하나 넣고 밥 말아먹으면 한 끼 뚝딱인데! 후루룩~먹고 누워서 텔레비전 보고 있는데 친구가 들어온다.


“ 아~라면 냄새. 또 라면 묵었나.”

“어~”

“니는 좀~제대로 된 반찬 좀 챙겨 묵지!”

“아~몰라~귀찮다”

“가시나가~진짜. 양파랑 당근 있는데 그거 썰어가꼬 스크램블이라도 만들어 밥 하고 묵지. 맨날 라면이 뭐꼬?”

“언제 양파 껍찔 까고 앉아 있노. 시간 아깝따.”

“그렇게 누워서 텔레비전 볼 시간에 양파껍질 까겠다. 잠깐만 하면 되는데 니는 그거 하기 싫다꼬 맨날 라면 묵나”

“아~몰라. 나는 요리하는 시간이 젤 아깝드라. 그 시간에 누워 있는 게 더 좋다”

“고마 죽자~이년아”


약속시간에 진심인 나와 요리에 진심인 친구는 그렇게 5년을 같이 살았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러고 살고 있었을거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만날때 늦게 나오고 나는 남편이 만들어 둔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 반찬이 없으면? 라면 먹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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