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뽀닥 Jun 09. 2021

그곳에 심장을 두고 오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시민 작가 양성 프로젝트]로 에세이 쓰기 강좌 참가 인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뜬 것을 봤다. 10회 수업이고 무료였다. 무료! 미약한 글솜씨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싶어서 재빨리 등록했다. 매주 선생님이 글 주제를 주시는데 이번 주 주제가 좀 난감했다.


“이번 주 글 주제가 초난감인뎅... 도저히 소재거리가 없어. 크흑”

“주제가 뭔데?” 남편이 물었다.

“내가 사랑한 공간, 장소, 특별한 추억이 얽힌 곳에 관해 쓰는 거야. 근데 남편도 알다시피 내가 딱히 공간이나 뭐 그런 것에 애착이 없잖아. 가고 싶은 곳도 그리운 곳도 없어서 말이야.”

“대학로 어때? 우리 연극 보다가 만났잖아. 나는 대학로만 가면 진짜 좋아. 그때 진짜 나 최고였는데, 아주 펄떡펄떡 날아다녔지! ”

 아니다. 내가 남편이랑 그 시절 연애해봐서 잘 아는데 전혀 날아다니지 않았다. 인간은 저렇게 과거를 조작하는구나.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남편을 반면교사 삼았다. 무덤덤한 나와 달리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남편의 대학로 예찬은 그칠 줄 모른다. 연극 보는 것이 너무 좋아 대학로에서 자취를 했다는 남편의 얘기를 듣는데 갑자기 나의 첫 자취방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그런 곳이 있었지! 만화가가 되겠다고 짐 싸들고 서울로 상경한 그때, 그 시절, 그곳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20년 전.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오자마자 얻은 첫 자취방은 한겨레 신문사가 위치한 마포구 공덕동이었다. 나는 한겨레 신문사가 운영하는 문화센터 강좌 중 1년 과정의 '출판만화 전문반'에 합격한 터였다. 한겨레 문화센터 출판만화 전문반! 그곳은 한겨레신문의 만평을 연재하시던 박재동 선생님과 태권 v의 원작자이신 김형배 선생님, 임꺽정의 저자이신 이두호 선생님과 악동이로 유명한 이희재 선생님 등 1990년대 출판 만화계에서 내로라하시는 선생님들이 강사로 계신 곳이었다. 그런 분들에게서 수업을 들을 수 있다니! 부산 출신 어리바리한 만화가 지망생이었던 나에게는 '출판만화 전문반'이 있는 공덕동이 만화의 성지 같이 느껴졌다. 그 만화의 성지로 30명의 각양각색 사람들이 모였다. 명문대생, 중졸 막노동자, 직장인, 유명 만화가의 문하생과 나처럼 밑도 끝도 없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의 친화력이란 무서운 것이다. 우린 순식간에 친해졌고 곧 복숭아 통조림과 소주로 도원결의를 맺었다. 이 의형제 만화가 지망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우르르 몰려다니며 공덕동 술집에서 밤새 선생님들과 토론하고 술집 마감 시간이 되면 선생님들의 작업실로 쳐들어가 만화에 대한 열정인지 술에 대한 열정인지를 쏟아내곤 했다. 1년 동안 마포구 공덕동은 어린 만화가들의 꿈의 무대였다.

1년이 지난 후 서울 여기저기 흩어져 자취하던 친구들이 홍대로 슬금슬금 집을 옮기기 시작했다.

90년대 말 홍대 앞은 인디밴드들이 연주하던 클럽과 만화가들, 화가들의 작업실이 널려있는 가난한 예술쟁이들의 안마당 같은 곳이었다. 거리 곳곳의 클럽 입구엔 공연하는 밴드들의 시간표가 빼곡히 적혀 있었고, 좋아하는 밴드가 출연하는 날이면 미쳐 노느라 막차 시간 끊기는 줄도 몰랐다. 막차를 놓치면 첫차 다닐 때까지 길거리에서 놀았다. 4차선 도로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기도 했다. (돌았었다) 그렇게 놀다가 지치면 근처 친한 언니, 형, 동기들의 작업실 아무 곳이나 들어갔다. 새벽까지 잠들지 않는 만화쟁이들은 구석구석 있었다. 작업실에서 선배들의 만화를 감상하고, 내 만화는 욕을 먹고, 친구들 만화는 깔아뭉개며 시간을 보냈다.

그림이 보고 싶으면 인사동으로 갔다. 작은 갤러리들로 가득 찼던 인사동 골목은 늘 전시회가 있었고 대부분이 무료였다. 알지도 못하는 신진작가들의 전시를 보고 남들 저렇게 열심히 작업할 때 우리는 술 처먹고 도로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구나 하며 다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작업실로 돌아왔다. 마포와 홍대, 인사동에서 어린 만화가 지망생들의 심장은 그렇게 뛰고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떻게든 되겠지 했으나 결국 어떻게도 되지 못한 중년만 되었다. 문득문득 정말 어떻게도 되지 않았네, 나는 서울에서 왜 이러고 살까 따위를 생각하며 우울해질 때가 있다. 나는 만화가가 되지 못했고, 예술이나 만화와 아무 상관 없는 평범한 일로 돈을 벌었다. 의식주는 해결하고 살고 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그건 서울 아닌 어느 도시에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청춘의 한가운데를 관통한 그곳들. 나는 거기에 펄떡펄떡 뛰던 젊은 날의 내 심장을 두고 왔다. 내 심장의 에너지로 돌아가던 그 시절 그곳들은 지금 거대 아파트들과 맛집과 예쁜 카페가 점령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지금은 또 다른 젊은 심장들이 그곳을 뛰게 하겠지. 하지만 근처만 가도 흥분되는 것을 보면 두고 온 내 심장은 아직 거기 살아 있는 것이다. 그거면 됐다.


 갑자기 남편에게 미안했다. 남편은 대학로에 심장을 두고 왔을 것이다. 그 시절 최고였다는 남편의 말은 사실이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가진 사람이 최고이지 않으면 당최 뭐가 최고란 말인가.

주말에 대학로로 나들이 가야겠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남편에게 오래간만에 본인의 심장 소리를 들려줘야지. 그리고 집으로 오는 길 홍대 들러서 케이크이라도 하나 사 와야겠다. 내 심장도 여전히 그곳에서 잘 뛰고 있는지 들을 겸.





매거진의 이전글 진짜 운동하기 싫을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