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23. 늠비봉~삼불사
헐거움을 비집고 새어드는 드센 바람이 이제야 겨울이라 말한다. 문을 꼭꼭 닫아걸고 비로소 겨울을 맞는다. 닫음으로써 맞을 수 있는 계절. 모순을 품은 계절이라 할 수도 있으나 온몸이 꽁꽁 어는 칼바람 앞에 서보지 않고 겨울을 맞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겨울바람 맞으러 나선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바람 끝이 차지 않다. 저수지의 물도 깡깡 얼지는 않았다. 해도 새들이 조용한 것을 보니 춥긴 추운가 보다. 파르스름한 냉기에 멀리 보이는 부드러운 능선조차 차다. 삼불사에서 지마왕릉을 지나 부엉골로 가는 길에 본 몇 그루 동백이 꽃을 피우려다 찬기에 멈칫, 얼음이 된 것 같다.
꽃망울 들여다보다 활짝 벌어진 열매 깍지를 봤다. 껍질이 두껍고 딱딱하고 단단하다. 씨앗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없는데 어떤 것은 아직도 암술대를 꼭 부여잡고 있다. 동백 씨앗은 처음 보았다. 한 개의 열매에 세 개의 씨앗이 들었고 무당벌레 형태에 잣처럼 고급 진 갈색 겉껍질에 싸여 있다. 이 껍질도 단단하여 잘 쪼개지지 않는다. 집에 와 쪼개보니 속껍질 입혀진 씨앗이 나온다. 정말 야무지게도 감싸 두었다. 나무는 씨앗을 지키느라 싸고 또 싸도 사람은 싼 것을 풀고 풀어 먹고 기름을 짠다. 기름 넉넉히 얻을 만한 크기라 사람은 재미지겠다. 요즘엔 동백기름을 머리는 물론 피부에도 바르고 먹기도 한단다. 나는 그냥 씨앗이 예뻐 몇 개 주워 와 참나무, 잣나무, 조각자나무, 편백나무 등등의 씨앗이 들어있는 작은 병에 담아 두고 오래 보기로 했다.
조금 걸으니 장갑을 낀 손에도 열이 나고 모자도 답답하여 벗는다. 해가 나고 바람이 불지 않아 춥지 않다. 계곡엔 얼음이 넓고 얇게 얼었다. 부엉골의 특징이다. 대개 계곡이 말라있는데 어디서 스며 나와 어는지, 매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언다. 덤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꼬리깃을 꼿꼿이 세운 것이 굴뚝새 같은데 금세 바위 아래로 사라져 아쉬웠다. 다시 만날까 하여 등로 대신 계곡을 걷는다. 얼음이 녹는 중이라 미끄럽지는 않다. 밟으면 폭신 들어간다.
새는 다시 만나지 못하고 자연이 전시한 미술관을 관람하는 기분으로 얼음이 얼면서 만든 무늬를 바라본다. 바람과 물결의 흐름이 그렸을 원형 꽃의 추상화와 나뭇가지와 마른 풀잎을 이용한 설치 미술 작품이 푸르스름한 얼음 위에서 피어나 서늘하게 아름답다. 하트 모양도 새겼는데 자연이 스스로 만족하여 누른 좋아요 같아 웃었다. 자연도 아는 게다. 지금 세상은 공감의 하트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진심과 응원과 품앗이가 뒤섞여 있다는 것도 알까? 이것을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가끔 생각하나 매번 흐지부지 지워진다. 모르겠다.
파르라 한 얼음을 네모난 액자에 담는다. 차고 시린 파르라 한 색감에 문득 서러운 마음 든다. 어제 필사한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은 아픔'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떠올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졸졸, 어디선가 들려온 물소리에 멍한 응시에서 벗어났다. 얼음이 녹아 구멍이 뚫렸다. 그 아래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더 아래에선 송사리 피라미 봄을 기다리고 있을까, 작은 물고기들 어디에서 지낼까 궁금해지는 구멍 속이다. 모든 생은 아픔이야, 구멍에 속삭이고 그만 일어난다.
계곡을 벗어나 등로로 걷는다. 늠비봉에 오르니 탑 꼭대기에 까마귀 두 마리가 망을 보고 있다가 내가 능선 위에 오르자 저들은 파란 하늘 속으로 뛰어든다. 능선에는 탑과 나만이 남아 바람을 맞는다. 찬 바람이 헤집고 지난다. 잠깐 맞는 바람이라 시원하다. 조금 머물다 부흥사를 지나 포석정으로 가는 임도로 내려간다.
새들이 깨어나고 있다. 이번 겨울엔 딱따구리들이 유난하다. 오늘도 흔한 새들을 많이 보았는데 특별히 이마가 붉은 오색딱따구리 수컷을 보아 흐뭇했다. 또 나무를 기어오르는 쇠딱따구리와 나무를 거꾸로 타고 내려오는 동고비도 보았다. 상봉하려나 지켜보았는데 동고비가 먼저 떠나 무산되었다.
오목눈이와 동고비를 시작으로 곧 새들의 짝짓기 철이 돌아올 것이다. 아직은 대부분의 새들이 소리 없이 먹이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때때로 박새의 울음소리가 달라지고 있다. 아마도 구애를 하기 위해 연습 중인 것 같다. 언 바닥을 흐르는 물과 같이 한겨울 한파에도 모든 대답은 흐르고 있다.
참새나 곤줄박이 같은 새의 헌 둥지를 품은 사방오리나무 잎눈에서는 파릇한 잎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고 성급한 다람쥐는 겨울잠에서 깨어 부스럭 소리를 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좀 더 코 자렴, 춥단다.
춥지 않게 걸은 짧은 길이었는데도 다 내려왔을 때엔 다리와 발가락이 굳어 있던 것을 보면 날이 차긴 했나 보다. 추운 줄 모르고 나온 다람쥐와 내가 다를 게 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