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골에서 3년
매년 3월이면, 내가 사는 호주 시골마을에서는 축제를 연다.
달이는 이 축제를 좋아한다. 그림이나 만들기 등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하면 상금을 받기 때문이다. 한 카테고리에 보통 세네 작품이 출품되므로 만들어 내기만 하면 상 받을 가능성은 4:1 정도로 높다. 비록 상금이 1, 2 달러로 약소 하나, 티끌 모아 태산이다. 수상자 리스트의 자신의 이름 옆에 사인을 하고 자신의 이름이 적힌 하얀 봉투에 동봉된 상금을 받아오는 것은 열두 살짜리에겐 가슴 벅찬 일이다. 한 달 전부터 쇼에 낼 작품에 대해 고심하기는 했다. 허나 호주 시골에 사는 열두 살짜리의 하루는, 학교 다녀와 운동이나 공부 같은 하나의 방과 후 활동을 하고 인터넷으로 아는 형님을 한편 정도 보고 나면 끝나는 짧디 짧은 것이다. 마침 쇼가 일주일 내로 다가오고 삼일 후 작품을 출품해야 하는 날이 오자... 달이는 아프기로 결심한다.
"엄마, 나 오늘 좀 아파서 학교에 못 갈 거 같아"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엄마가 볼 땐 괜찮은 거 같은데?"
"요새 날씨가 좀 변덕이 심했잖아, 머리도 아프고 힘도 없고..."
말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눈빛을 피하는 게 심상 적다. 본심은 이미 접수됐지만, 모른 척한다.
"그렇구나, 엄마도 요새 몸이 좀 안 좋아. 환절기에는 그렇더라... 그런데 이런 건 집에 쉬어도 별로 나아질 거 같지 않은데? 하루 이틀 쉰다고 낫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학교 가서 친구들이랑 놀고, 바람 쐬고 하는 게 더 나을 텐데"
"응... 그런데 이번에는 하루만 쉬면 싹 나을 거 같은데?"
"집에서 뭐 하면 나을 거 같은데?"
"응 우선 내 방 정리 좀 하고 따뜻하게 누워 쉬고, 또 쇼에 낼 작품도 좀 만들고..."
옳다 걸렸구나. 쇼에 낼 작품 만들 시간은 없고 내고는 싶고. 그러니 아프다는 핑계로 결석하기로 마음먹은 거다.
한국에서라면 이런 일에 결석이라는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약해 빠진 정신 상태를 운운할 것이었겠지만,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있는 곳은 호주이니 융통성을 발휘해 보기로 한다. 호주에서 결석은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혹은 '단지 학교 갈 기분이 아닐 때'에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이었던가.
"그럼 오늘은 엄마가 일하러 가야 하니까, 내일 우리 둘 다 쉬면서 만들기에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
아이는 큰 긍정의 고갯짓을 하고 씩씩하게 학교로 나선다.
다음날, 달이는 온 집안에 있는 재료가 될 만한 것을 다 거실로 끌어 모았다. 일 년 전에 사 둔 드림캐처 재료를 가지고 실랑이해보다, 삼 년쯤 묵혀놓은 뜨개질을 갑자기 시작한다. 오늘 목도리를 하나 떠서 출품한다나?? 유튜브를 보고 '생각보다 쉬운데? 난 한번 해보면 잘한다고!' 자화자찬을 하며 신나게 떠간다. 서너 줄 쯤 떴을까? 울퉁불퉁 모양이 생각만큼 이쁘지 않다. 뜨개질은 쇼가 끝난 다음 시작하기로 하고 거실 바닥에 내던져졌다.
'케이크를 구워야겠어'
컨트리 쇼에서 케이크는 중요하다. 마치 시골 아낙들의 집안 살림 솜씨를 보는 듯 베이킹, 유리병에 담긴 피클, 잼, 퀼트 등이 쇼의 주요 출품대상이다. 아이는 케이크를 굽고 쿠키를 만든다. 계란을 깨고 녹인 버터를 가루와 섞는 손 모양이 꽤나 능숙하다. 역시나 레시피를 충실히 따르기보다는 마음 가는 대로 만들고 만다. 케이크 반죽 위에는 '맛있으라고' 생크림을 한 컵 정도 때려 부었고, 쿠키는 너무 오래 구운 탓에 이빨이 들어가지도 않아 씹어 먹을 수도 없다. 다행히 맛은 평가대상이 아니다. 쿠키는 먹지는 못해도 알록달록하니 장식은 할 수 있다며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케이크를 마무리했다. 쿠키를 침으로 살살 녹여먹으며...
다음은 꽃 장식이다. 우리가 사는 집의 정원은 정말 아름답다. 집주인 그웬 할머니가 갖가지 꽃을 심어놓고, 팸이라는 정원사가 와서 관리를 한다. 나는 꽃에 별로 관심 없는 편이었다. 꽃바구니보다는 과일 바구니가 좋고, 정원이 있으면 꽃보다는 야채를 심는 실용 파다. 하지만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변해가는 계절에 따라 바뀌어 가는 정원의 모습은 황홀하다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면서도 손발이 오그라지지 않을 정도다. 장미에 그렇게 많은 종류와 색상과 향기가 있었는지... 재미있는 이름의 깜찍한 들꽃들과. 화려함을 뽐내는 아이리스, 달리아, 백합 등. 매일매일 꽃들을 보며 행복함을 만끽 중이다. 덕분에 가드닝 오스트레일리아라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보는 것 같은 프로그램의 열성적인 시청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달이는 열심히 꽃 장식을 하다가 '엄마, 이 꽃들도 쇼에 내면 안돼?' 물어본다.
"되지, 꽃 출품하는 섹션도 있을걸"
"이 꽃들 내면 상 많이 받을 거 같은데, 우리 정원 꽃 이쁘잖아"
"근데, 꽃은 직접 기른 꽃만 출품할 수 있을 텐데?"
"그럼 이 꽃들은 누가 내야 하지? 그웬 할머니 꽃이지만 우리가 렌트하고 있으니 꽃을 꺾을 수 있는 권리는 우리에게 있어. 하지만 우리는 꽃 키우는 데는 아무런 수고를 안 하고 팸 할머니가 다 돌봤는데?"
나름 복잡하다.
"그래, 그럼 엄마가 팸 할머니한테 한번 물어볼게"
그렇게 팸 로버츠 찾기는 시작되었다.
팸 로버츠는 바쁘신 분이다. 꽃꽂이와 정원 관리에 대한 강의도 하고, 남의 정원을 관리해 주기도 하고, 동네 요양원에 가서 머리도 깎고 하는 다재다능한 분이다. 그러니 집에 계시는 시간을 알 수 없다. 여태껏 그녀에게 전화할 용건이 없었으니 전화번호 역시 알지 못한다.
목요일 테니스를 치고 함께 하는 레이디들께 의견을 여쭙는다.
"정원에 피는 꽃을 쇼에 출품하고 싶은데요, 정말 이 동네에서 제일 이쁜 꽃 들이거든요. 근데 문제는 그웬 할머니 꽃인데 우리가 렌트하고 있고, 팸 할머니가 관리하세요. 달이는 본인 이름으로 내고 싶기도 하고 아니면 그웬 할머니 이름으로 내고 싶은데, 그거 여쭙자고 요양원 찾아가는 것도 오버 같고요."
듣고 보니 그러네... 레이디들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갸우뚱거리신다.
"그냥 달이 이름으로 내, 어차피 자기네가 렌트하잖아"
"네, 근데 달이가 남의 수고를 가로챌 수는 없다네요"
테니스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옆집 헤더 할머니가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드신다.
헤더 할머니와 그웬 할머니는 50년 넘게 옆집에 살아온 이웃이다. 헤더 할머니 의견을 여쭙기로 했다. 반갑게 열어 주신 문을 따라 들어간 거실에는 부처님 머리 상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불교 믿으세요?"
"아니, 그냥... 좋아해. 마음이 평온해지거든" 예의 수줍은 소녀 같은 표정으로 대답하신다.
같은 질문을 드린다.
"저희 정원의 꽃을 쇼에 출품하고 싶은데요, 정말 이 동네에서 제일 이쁜 꽃 들이거든요. 근데 문제는 그웬 할머니 꽃인데 우리가 렌트하고 있고, 팸 할머니가 관리하세요. 달이는 자기 이름으로 내고 싶기도 하고 아니면 그웬 할머니 이름으로 내고 싶은데, 그거 여쭙자고 요양원 찾아가는 것도 오버 같고요."
"그래... 듣고 보니 그러네. 근데 어차피 자기네가 돈 주고 렌트하잖아. 그럼 정원 꽃도 자기 네꺼지. 그웬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 같은데? 그냥 달이 이름으로 내"
"근데 달이가 남의 수고를 가로채고 싶지는 않다네요, 팸 할머니한테 여쭤보고 싶은데 어디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말도 없이 주방으로 가서 팸 할머니의 집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 건네주신다. 서너 번쯤 걸었을까, 연결이 되지 않는다. 오늘이 작품 등록 마감날이다. 우선 달이가 마무리해놓은 작품을 급하게 챙겨 행사장으로 간다. 우선 오늘 등록을 먼저 해 놓으면 꽃, 야채, 베이킹 등 상하기 쉬운 것들은 쇼 바로 전날인 내일 가지고 가면 된다. 아이들의 작품을 차 한가득 가지고 온 다둥이 엄마, 갖가지 수예 용품을 가지고 온 화요일의 퀼트 친구 할머니. 작은 사무실이 가득 차있다. 등록 용지를 작성하고 있는데 마침 프랜시스가 들어온다. 프랜시스는 그웬 할머니의 아들의 부인, 즉 며느리다. 마침 이 쇼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인구 천오백 명의 작은 마을에서는 이렇게 모두가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
"프랜시스, 마침 잘 만났어요."
고장 난 라디오 같이 몇 번이 난 한 같은 이야기를 또 꺼낸다.
" 꽃을 쇼에 출품하고 싶은데요, 달이랑 저는 우리 집 꽃이 이 동네에서 제일 이쁘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문제는 그웬 할머니 꽃인데 우리가 렌트하고 있고, 팸 할머니가 관리하잖아요. 누구 이름으로 내야 할까요?"
"그러게? 듣고 보니 그러네? 그웬은 어차피 그 집에 안 살잖아. 자기네가 렌트비를 내고 있으니 달이 이름으로 내면 될 거 같은데?
"하지만 우리는 그 꽃을 가꾼 적이 없는걸요. 쇼 규정에는 분명히 본인이 가꾼 꽃만 출품 가능하고요. 팸 할머니 이름으로 내고 싶은지 물어보고 싶은데요?"
"그래? 팸한테 물어봤어?"
"헤더 할머니가 전화번호를 줘서 집에 전화했는데 안 계신 거 같아요."
"그 집 전화 안 쓴 지 오랜데... 잠깐 있어봐" 하더니 팸 할머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다.
"팸, 그웬네 정원 꽃 있잖아. 자기 이름으로 출품할 거야? 안 할 거면 달이 이름으로 출품해도 될까?"
단호한 팸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온다.
"그웬 이름으로 출품해야 한대"
"좋아요!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프랜시스가 등록해줄 수 있죠?? 꽃은 내가 내일 꺾어 올게요"
그렇게 삼 일간의 팸 로버츠 찾기는 마무리가 되었고. 그웬이 정원에 심은, 팸이 가꾼, 달이가 사는 집에 핀 꽃은 그웬의 이름으로 쇼에 출품됐다.
토요일, 쇼가 열리는 날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모두가 무언가에 참가해야지만 마을이 굴러가므로 이 마을 생활 3년 차인 나도 입구에서 입장권 판매 봉사를 자원했다. 아침에 보슬보슬 내린 비에 쇼가 취소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오락가락하던 비는 점심때쯤 따스한 햇살에게 하늘을 양보했다. 입구에 앉아 사람들과 인사와 농담을 나누고 돈을 받고 입장권을 팔에 채워주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쇼가 열리는 전시관에 들어간다. 솔직히 이년 전 처음 이 쇼에 왔을 때는 그 조악함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낡고 오래된 건물에 수북이 쌓여 있는 양털들과 울퉁불퉁 제각각 모양의 야채와 과일들. 집에 있는 이불을 가지고 나온 것 같은 할머니들의 퀼트 작품들. 재활용 유리병에 담긴 잼과 피클들. 한국 사람인 내가 이해하는 쇼라면 도대체 무언가를 감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살며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쇼에 가서는 작품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벽에 걸린 퀼트는 나와 함께 화요일마다 퀼트를 하는 할머니가 4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일흔이 훌쩍 넘고 허리가 굽고 손가락 마디가 아파 한 번에 오래 할 수도 없으신 분인데 또 꼼꼼하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얀 배경에 베이지색으로 수를 놓아 퀼팅을 한 작품인데 그 아름다움과 수고에 한참이나 감상을 했다. 또 스크랩북킹 중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크리스 할머니가 4대째 이어 내려온 귀한 사진을 후대에 이어 주기 위해 정리하고 계신 것이다. 쇼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요리사 옷을 입은 허수아비는 얼마 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조노의 아이들이 사랑하는 아빠가 원래 입던 요리사복과 모자 등으로 장식해 아빠를 쇼에 초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아이들이 만든 작품들을 보면 그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얼마나 신나게 열정적으로 이 쇼를 위해 분주히 준비했을까를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이곳에 와 텃밭을 가꾸고 닭을 키워 보니 테이블 위에 막 쌓여 있는 이 과일과 야채 양털을 얻기 위해 노력했을 사람들의 수고가 느껴진다. 이 조악한 쇼를 어찌 비웃을 수 있을까? 나는 감상했고 감탄했고 쇼를 온전히 즐겼다.
달이는 여러 개의 상을 타고 20달러가량의 상금을 받고 흡족해했으며, 그웬 할머니의 꽃 역시 여러 개 수상을 했다. 할머니는 상장은 받으시고 상금은 달이가 받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하시며 쇼를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