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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Nov 16. 2019

프랑스에 성당이 있다면 한국엔

나에게 성당은

어릴 때 부모님은 성당에 가는 거라면 언제든지 가라고 하셨다. 기도해도 좋고 놀아도 좋으니 성당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는 거였다. 평일엔 그렇게나 공부하라고 다그쳐도 주말엔 공부하라는 말 한마디를 안 하셨다. 요즘 같이 우리나라 곳곳에 빌딩 같은 성당이 들어서기 전엔 모두 큰 널찍한 마당이 있는 성당이었다. 미사 시작하기 전까지 친구들이랑 뛰어놀다가 미사가 끝나면 주일학교 선생님과 마당에 둘러앉아 교리교육을 받았다. 따뜻한 햇살이 쬐는 날에 먹었던 소시지 빵과 우유는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마당 곳곳에 삐죽 튀어나온 잡초까지도 추억이 된 어린 시절의 성당은 나에게 놀이터였다.


지금 프랑스에 살고 있는 나에게, 동네 곳곳에 세워져 있는 성당은 쉼터다. 주일이면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프랑스 신자들을 만나며 반갑게 인사한다. 아마 1주일 중에 프랑스어를 가장 많이 쓰는 날이 주일일 것이다. 아무도 나에게 프랑스어를 지적하지 않고 누구나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어준다. 내 자존심을 지켜주는 곳이 성당인 셈이다. 평소에도 나는 어지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성당에 간다. 어디서든 5분 거리에 성당이 있으니 쉽게 문을 열고 앉아서 기도할 수 있다. 넓고 높은 성당 안에서 고요한 가운데 홀로 기도하고 있으면 마치 내가 하느님을 독차지한 기분까지 든다. 가끔 기도하다가 마음이 너무 편안한 나머지 코를 골고 졸다가 신부님이 날 깨운 적도 있다.


클레르몽페랑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프랑스 성당은 볼거리도 제공한다.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뾰족한 종탑은 가히 압도적이고 형형색색의 널찍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정말 천국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성당 외벽에 세워져 있는 성경 속 인물과 여러 성인들은 마치 이 도시를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보통 이런 성당은 수 백 년 전에 지어졌을 것이다. 당시 기술력으로 어떻게 이런 건축을 만들어냈는지 도무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프랑스혁명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거나 훼손된 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것 또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엑상프로방스의 성당들

엑상프로방스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은 생 소뵈르 대성당(Cathédrale Saint Sauveur)과 생장드말트 성당(Église Saint-Jean-de-Malte)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구원자 대성당, 몰타의 성 요한 성당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불과 150여 년 전까지 엑상프로방스에 있던 성벽 안을 생뵈르 대성당이 관할했다면  생장드말트 성당은 성벽 밖을 관할했었다. 이 동네의 양 축이 되는 유서 깊은 성당인 것이다. 


엑상프로방스 생 소뵈르 대성당과 생장드말트 성당

생 소뵈르 대성당은 세계 건축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일단 성당 겉모습부터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고딕 양식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고 내부도 정돈되어있는 듯한 느낌은 아니다. 그런데는 이유가 있다. 생 소뵈르 대성당은 6세기에 지어지기 시작해서 최근까지 계속 증축을 했기 때문이다. 1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당시에 유행하던 건축 양식들이 더해져서 지금의 성당을 만들어냈다. 로마네스트 양식, 고딕 양식, 바로크 양식 그리고 현대적 건축 기법까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정말로 잘 어울리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순수 고딕 양식을 보고 싶다면 생장드말트 성당에 가면 된다. 13세기에 지어진 이 성당은 예루살렘에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몰타 기사단이 세운 성당이다. 오래전부터 프랑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예루살렘에 가보는 게 가장 큰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북쪽으로는 이슬람 국가가 세워져 있어서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지중해를 건너는 방법뿐이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불과 30여 Km밖에 안 떨어져 있는 마르세유는 예루살렘에 가기 위한 순례자들이 떠나는 큰 항구 도시였다. 분명 생장트말트 성당은 순례자들이 안전하게 떠날 수 있게 프랑스 땅에서 마지막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성당은 웅장함만 남아있을 뿐 예술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대부분 부서지고 약탈당했기 때문이다.



유럽에 대성당이 있다면 한국에는

어느 때와 같이 성당을 배경을 두고 카페에 앉아서 친구랑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었다. 쓰디쓴 커피 한 모금과 푸른 하늘에 걸린 성당 종탑을 보고 있으면 정말 내가 유럽 사람이 된 기분이다. 한창 감상에 젖어 있을 때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유럽 성당은 진짜 멋지지? 한국에도 이런 성당이 있어?"


있다고 대답했다. 바로 명동 대성당. 우리나라에 최초로 설립된 성당이자(성당 공동체로서 시작은 최초였으나 건물로서 최초로 지어진 곳은 중림동 약현성당이다) 순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다. 나는 명동 대성당 근처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는데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여러 직장인들이 성당에 와서 쉬고 있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다. 명동 대성당은 종교적 장소뿐만 아니라 명동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종교와 문화가 어우르게 섞여서 제 역할을 톡톡 하고는 명동 대성당을 프랑스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앙제에 있는 생 자크 성당. 작은 마을 성당이다.

그러나 프랑스 친구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말로는 '와우 아름다워!'라고 말하고 있지만 분명 진심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예의상 말하고 반응하는 특유의 표정을 난 알고 있었다. 난 실망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명동 대성당이 프랑스에선 동네마다 있으니 그도 그럴 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의 종교 문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역사는 불과 20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 크게 내세울 거리는 아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럽을 천 년 동안 지배했던 사상이 그리스도교였다면 동아시아는 불교가 천 년간 지배했었다고. 한국의 절이라면 유럽의 대성당과 충분히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았었다. 프랑스 친구는 한국의 절을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 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본다면서 이제야 진심 어린 감탄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휴대폰으로 보여준 절 사진에 정신이 팔려서 정작 우리 옆에 있는 대성당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 친구는 처음에 사진 속에 있는 절을 찾지 못했었다. 어떤 게 절이냐며 당황하기만 했었다. 대개 우리나라 절은 산속에서 튀는 듯 튀지 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산에 세워져 있는 절 전경에서 절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게 당연하다. 


"한국 건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주변과의 조화야. 특히 자연과 얼마나 잘 어울리냐에 따라서 건축물의 아름다움이 좌지우지하게 돼."



부석사와 봉은사

절에는 자연을 중요하게 여겼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모두 담겨있는 것 같다. 부드럽게 구부러진 절의 지붕은 마치 산 등성이를 닮았고 지붕 아래 처마와 창살은 산속의 나뭇가지의 연장선이라고 해도 충분하다고 본다. 내 설명을 들은 프랑스 친구는 진지한 어투로 나에게 물었다. 


"한국인들에게 절은 어떤 존재야?"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이며 지금까지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말을 했다. "유럽 사람들이 대성당에 가면 마음이 움직이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절에 오면 마음이 움직입니다." 가톨릭 최고 성직자였던 그에게도 절은 평안함을 주는 곳이었다. 나는 프랑스 친구에게 김수환 추기경의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는 자연에서 왔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자연 속에 살아 숨 쉬는 절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프랑스 친구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충분히 접하고 이해하고 있는 나에게는 성당과 절이 모두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각기 다른 편안함이다. 웅장한 성당은 내가 마치 보호받고 위로받고 있는 듯한 편안함이고 자연 속에 숨 쉬는 절은 내 마음까지 다 내려다 놓고 쉴 수 있는 편안함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방학을 보낼 때 눈 앞에 성당과 절이 보이면 다 들어가 보고 있다. 두 종교에서 주는 편안함을 들고 프랑스에서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바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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