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5살, 7살로 연수 가기에 조금 아까운 나이였다. 3학년쯤 되어야 다녀와도 영어를 잊어먹지 않는다는 주변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을 탈출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기에 아쉬울 것이 없었다. 큰 아이 6살까지 입주이모님이 계셨고, 나는 새벽 5시 반 집에서 나가서 밤 12시에 들어오는 삶 속에 숨 정도 쉬고 있었다. 어느 날 이모님이 깜빡하고 냄비 불을 안 꺼서 집에 화재가 크게 날 뻔했고, 그다음 날 이모님이 미안하다며 그만두시며 난 이제 숨조차 쉬기 힘들어졌다. 급하게 근무 시간을 조정하고 친정엄마가 투입이 되셨다. 근처에 살기는 했지만 친정엄마도 일하시던 중이라 모든 것이 비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몇 달, 숨을 안 쉬고 살던 나는 마음과 몸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그 순간 나를 구해준 남편의 연수 일정에, 큰 고민 없이 주인집에 전화해서 전세를 빼겠다며 일정을 말했다.
한국에서 탈출했지만 순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가끔 내 탓이라는 논리적인 접근을 해 보지만, 어쨌든 어떤 길을 선택하건 쉽게 흘러가는 인생이 아닌 것은 맞았다. 남편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야근 없는 삶을 살아보게 되었고 나는 처음으로 이모님과 친정엄마 없는 걸음마 엄마로 아이들 앞에 덩그러니 있어야 했다. 몇 달을 아이들 적응으로 정신을 못 차렸다. 애들을 혼자 손으로 키워본 적이 없는 나는, 그들의 기분 파악도 안 되고 말도 안 되게 들리겠지만 뭘 할 때 아이가 즐거워하는지도 잘 몰랐다. 극한의 적응환경 속에 달랠 줄도 모르는 엄마와 집에 있어본 적 없는 아빠가 아이들을 심히 더 힘들게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큰아이는 내게 조사 빼고는 영어로 말하였고, 작은 아이는 모든 대화가 '엄마'빼고는 영어였다. 알아듣느라 고역인 나는 '한국말로 해'라고 끊임없이 응대했지만, 대부분 내가 눈치껏 용써서 알아듣는 게 더 간단했다. 아이들은 '종아리'를 '병아리'라 하고, '비둘기'를 '비두라기'라 하며 까마득해지는 한국어를 아슬아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원래 돌아갔어야 하지만 나는 한국이 너무 두려웠다. 사실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나의 불안도는 극단에 있었다. 마트에 가도 맞은편 걸어오는 사람 품에 총이 있을 수 있고, 운전을 해도 내가 조금 잘 못하면 누군가 화나 시비를 걸 수 있었다. 아이 학교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언어로도 비자로도 아이를 온전히 보살펴줄 능력이 안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모든 것이 불안의 극단에 있어서, 때로는 평안해 보였다. 그런데 이런 미국에서 한국 돌아가는 게 더 겁나다니. 나의 울 수도 없는 시간 속 한국이 미국의 보호막 없는 생활보다 더 두려웠나 보다.
6개월을 더 머물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갈 집을 구했지만 입주 날짜가 맞지 않아 몇 달을 단기임대해서 살았어야 했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에, 나는 미국에서 아이 둘과 살다가 돌아가고 남편만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편을 LA공항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무서워 눈물이 났지만 내가 운전해야 하니 울 수 없었다. 울지 못하는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고, 나는 매일 전화를 해서 남편의 목소리로 내 불안을 눌렀다. 모든 것이 또 둔해질 시간이 흐르니, 남편과 통화는 시차를 핑계로 줄어들게 되고 우리 모두 서로가 없는 삶이 익숙해졌다.
하지만 딱 하나 안 익숙한 것이 있었다.
결혼해서 10년 넘게 인증서까지 내 손에 있었는데, 미국을 가며 모든 경제권이 남편에게 넘어갔다. 나는 남편 비자를 따라 미국에 갔기에, 통장이나 카드 개설을 내가 할 수 없었다. 심지아 Target 마트 카드도 내 앞으로 못 만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남편한테 경제의존적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래도 함께 있을 때는 남편이 환전해서 알아 채워 넣고, 관리비나 카드비도 빼먹지 않고 처리했다. 하지만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가서는 미국의 삶과 통장은 생각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다. 통장 잔액이 백만원 이하로 되면 나는 불안해서 송금을 해달라 하였고, 어느 날 카드값까지 쑥 빠져나가면 통장은 공포스럽게 비어있었다. 한국에서야 돈이 없어도 방법을 내가 찾을 수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통장이 생명 줄 같았다. 이런 상황을 나보다 잘 아는 남편이 돈을 늦게 보내기 시작했다. 전화해서 송금해 달라고 말해야 돈을 보내줬고, 그것도 환율 봐서 좋을 때 하겠다는 이유로 며칠이 걸려 통장이 채워졌다. 화가 많이 날 무렵쯤 되면 남편이 한 번씩 미국으로 휴가 내 오며 수습이 되었다.
휴가온 날 중, 잠든 남편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문자를 열어 보니 주식 통장에 관련된 문자였다. 나는 당장 남편을 깨워 어떻게 주식하며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냐고 폭발하여 분노를 쏟아 내었다. 그전에도 남편은 주식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더 그전에는 내가 통장을 관리하기 때문에 주식을 해도 큰 금액을 하지 못하였다. 몇 달 만에 아이들을 보러 온 남편은 나와 주식 때문에 정말 크게 싸우고 말도 안 하고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주식을 할 수는 있지만 몰래 한 것은 신뢰를 깨는 행동이다라는 입장이었고, 남편은 말하려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라는 내 머릿속에는 없는 언어를 쓰고 있었다.
남편 사주에서 재물은 자꾸 깊숙이 묻어두고 싶어 하는 형태이다. 반대로 나는 재물이 겉으로 환히 드러나서 가진 것보다 더 있다고 믿고 사는 구조이다. 명리학 공부를 하고 왜 남편은 상품권을 서랍 깊숙이 놓고가끔 보며 기뻐하는지 알게 되었고, 비상금도 자꾸 모으는지 그 마음을 알 수는 있었다. 땅속에 금을 넣어두고 가끔 열어보며 든든해 하는 것인데, 결국 쓰는 사람 따로 정해졌듯 나와 아이들이 홀라당 쓰고 있다. 우리한테 안 쓰는 비상금의 존재도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지만, 월급쟁이의 투명 지갑에서 나온 비상금이 든든한 구석이라면 어느 정도 인정해 주고 싶다.
둘 중에 누가 경제권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성향을 따진다면, 당연히 남편이 맞다. 나는 깊이 묻어둠은 없고 우선 써버리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내 사주상 재물이 겉으로 드러나 있으면 돈 쓸 일이 더 생길 수도 있다고 본다. 명리학을 공부하며 이런 결론이 내려져, 깔끔하게 남편에게 모든 경제권을 넘기게 되었다.
난 더 이상 잔고를 걱정하지 않는다. 소심한 내가 돈을 펑펑 쓰겠다는 지키지 못할 꿈을 만들지는 않지만, 한번 인수인계 하면 뒤돌아보지 않는 성향 탓이 크다. 믿고 맡겼으니 그걸로 끝이다. 나에게 상의를 하면 함께 고민할 수는 있지만, 보통은 이번달은 얼마 쓰면 되는지 물어보고 그거에 맞추는 '노력'을 해 볼 뿐이다. 남편이 주식을 하던, 취미생활을 하던 알아서 할 것이라 생각하고 맡긴다. 노후도 알아서 준비하라 했다. 난 현재를 살겠다고.
어제 남편이 한숨을 쉬며 통장 잔고를 걱정했다. 빚을 갚아야 하는데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나는 눈을 껌뻑이며 남편 속 뒤집는 말을 또 했다. 남편이 백만 번 말해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또 묻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