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ey수 Mar 12. 2024

완벽주의자의 치열한 얼렁뚱땅

엄마 너 수업 간 동안 교보문고 갔다 올 거야. 끝나고 톡해. 


전날 밤. 

다 재우고 누운 시간. 아이들의 핸드폰은 다운타임에 들어갔지만, 내 핸드폰은 이제 켠 느낌이다. 인스타를 켜서 낮 동안 쌓인 알림 들을 눌러보고 지인소식도 들어 본다. 그러다 이것저것 보여주는 대로 보는, 적극적인 수동성의 자유를 즐긴다. 주인 눈치 안 보고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무인샵에서의 아이쇼핑 같기도 하다. 그때 그들이 보낸 릴스에 눈이 커지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책을 소개했다. 제목은 " 안 읽으면 쪽박 나는 마케팅책 3가지 ". 밑줄 쳐가며 읽은 장면과 인덱스로 너덜너덜해진 책의 모습은 내 마음을 더 뛰게 만들었다. 내일 짬을 내어 꼭 교보문고 가야겠다고 플래너에 캡처한 사진을 첨부해 놓는다. 




다녀와야 하는 시간은 40분. 왕복시간 생각하면 빠듯했다. 날씨가 아직은 쌀쌀해서 학원밖에서 아이가 기다리면 안 되니 시간 맞춰 딱 와야 한다. 안 가면 안 되는 경우의 수는 없다. 하루 기다리면 배송이 되지만 난 이미 그 책을 읽지 못하면 루저가 된다는 확신에 빠져 있기에, 경우의 수는 가서 사는 것 한 가지다. 주차하자마자 익숙한 길로 빠르게 올라갔다. 


교보문고 냄새는 백화점 1층보다 설렌다. 공중에 지식을 뿌려놓은 듯 한 교보향수는 냄새만 맡아도 똑똑해지는 착각이다. 그런 우쭐한 마음이 다이어트해야 입을 옷을 미리 사는 것 마냥,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을 쓸어 담게 만든다. 책만 사도 이미 지식인이 된듯한 착각은 그들의 똑똑한 마케팅 탓일까 나의 허영일까. 미리 찾아놓은 책 위치로 빠르게 걸어가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멈췄다. 그래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는데 내가 이걸 안 읽고 있었다니 뒤쳐져도 한참 뒤처진 인생 같았다. 가다 말고 집어 든 책을 더욱 빠르게 결제하고 차에 오른다. 너무 읽고 싶어 신호대기 중에 젤 앞장 작가 프로필부터 읽어 본다. 


책의 제목은 "브랜드 설계자". 무려 고객을 몰입시키는 퍼널 강화기법이라는 마케팅의 진수를 알려주는 책이다. 378페이지의 책을 다 읽었을 때 얼마나 똑똑해져 있을까 싶은 마음에 또 설레며 책을 편다. 초반에 잠깐 읽자마자 이 책이 인생책이라는 확신이 왔다. 물건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물건의 주인이다라는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나는, 언제나 처럼 과감하게 책에 메모를 하고 줄을 긋기 시작했다. 

완벽히. 완벽히 더욱 완벽히

우선 겉표지 바로 안쪽에 색지는 내가 모든 책을 읽으며 첫 번째로 메모하는 위치다. 기억하고 싶은 페이지 수와 키워드를 적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응용한 나의 아이디어를 함께 적는다. 책 내용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모든 것을 내 상황에 대입시켜 보고 적용 가능한 아이디어를 도출해 본다. 모든 글자를 완벽히 소화해 내겠다는 완벽주의자의 기본 같은 것이다. 




1주가 지났다. 

책의 20% 정도 읽었는데 앞에 색지만으로는 중요한 내용이 감당 안되었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모서리를 접고 줄을 치며 읽다가 멈추었다. 이렇게 색지에 대충 적다 보니 내용 정리가 깔끔하지 않아서 나중에 소중한 지식들을 다 까먹을 것 같은 두려움에 빠졌다. 책상 주위를 뒤쳑여 보니 쓰다만 노트도 나오고 다이어리, 수첩도 굴러 나온다. 노트를 보니 책 요약 하다 포기한 흔적이 불편하게 남아있다. 그러다 눈에 띈 링으로 묶인 단어장. 아이들 단어 외우게 하려 샀다가 10개 쓰고 뒤는 다 새 종이다. 크기도 작아서 내가 과하게 많은 내용을 잘 요약하여 쓸 것 같았다. 또 나중에 들고 다니며 책에서 얻은 지식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데 적당해 보였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삼키자.


다시 처음 줄 친 곳으로 돌아가서 내용을 요약해 본다. 그러다 문뜩 내 요약에 책의 지혜가 일부 누락되면 어쩌나 싶은 깊은 걱정에 빠진다. 올해의 목표를 마음 편하게 살기로 정했으니, 손은 힘들어도 마음 편하게 줄 친 내용을 다 쓰자로 결정했다. 첫 줄부터 또박또박 베껴 쓰기 시작했다. 




2주가 지났다. 

아직도 책의 반도 못 읽었다. 이러다 인생책을 다 못 읽는 불편하고 슬픈 상황이 될까 싶은 생각에 이번에는 초조함에 빠졌다. 책을 읽고, 색깔 바꿔가며 줄 치고, 아이디어 내고, 모서리 접고, 내용에 맞는 색깔펜으로 메모장에 쓰다 보니 시간이 조금 길어지는 것은 인정한다. 손은 움직이지만 마음속에서는 이걸 왜 이렇게 다 적고 있냐고 다시 볼 것 같지 않다며 불 같이 요동을 친다. 조금 길어지는 시간 때문에 주옥같은 지식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루저가 될 수는 없다며, 펜을 다시 꼭 쥐어 본다. 없어졌던 연필 굳은살이 다시 생길 판이다. 




3주가 지났다. 

이제는 혁신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아찔함을 느낀다. 겨우 반을 넘긴 책을 끝까지 읽어 내기 위하여 나의 불편함을 자극하기로 했다. 블로그에 '3일 프로젝트' 라는 폴더를 만들고 그곳에 매일 읽은 것을 사진 찍고 올리기로 한 것이다! 스스로 천재라 생각하며 3일만이라도 매일 올려 보겠다고 공약을 걸었다. 3일이 여러번 쌓이면 크다는 생각까지는 한 것에 지금와서 짠함을 느낀다.  





실패했다.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내 블로그는 이웃 없는 외딴섬 같은 곳이었기에 실행하지 않았을 때 창피함을 앞세운 내 잔꾀는 나를 속이지 못하였다. 이웃이 10명만 되어도 지켰을 것 같은데. 어쨌든 '실패라 프로젝트를 마감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간절한 해시태그와 실패를 인정하는 내 댓글



깊은 고민에 빠졌다. 

1/4 정도 남은 책을 줄만치며 읽으면 2시간이면 다 읽을 것 같은데, 완벽하게 읽고 싶은 내 자아와 도저히 타협이 안된다. 뛰던 심장은 이제 시무룩하고, 앞에 읽었던 내용도 까마득하다. 메모장을 처음부터 읽어 지식을 완벽히 다져볼까 했지만, 책도 다 못 읽었는데 쓰다만 메모 읽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토요일. 

아이를 어린이 미사에 혼자 넣고 근처 커피숍에 앉았다. 메모장과 펜은 집에 두고 왔다. 그리고는 나를 끈질기게 잡아당기고 있던 완벽주의 자아의 줄을 싹둑 잘라버렸다. 더 이상 마침표 없이 살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끈에 묶인 완벽주의 자아보다 힘이 세진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또 다 못 읽을 것이 뻔한데' 라는 내 속의 목소리가 다 읽고 나니 보였다.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멋짐에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끈기 약한 사주를 타고났어도, 끈기 약하게 만드는 것을 잘라버리면 반대로 튕겨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인생책이 된 것은 까마득한 이 책의 내용이 아니라 378페이지 마지막 장을 만나서이다. 



       


완벽함의 줄을 끊어내니
그전에는 메모 적다 포기한 실패자가 될 일이,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어내는 성공한 경험으로 바뀌었다.
얼렁뚱땅 가위가 이렇게 속 시원할 수가.

 

202페이지 까지 적다가 중단한 메모는 이제 실패가 아니다. 


책만 다 읽었을 뿐인데, 벌써 힘차게 독립한 기분이다. 내가 나에게 마케팅을 잘 한 탓일까 나의 희망사항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