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충덕 May 23. 2024

논어 한글역주 2

김용옥 

   도올 김용옥의 <논어 한글역주 2>에는 팔일(八佾), 이인(里仁), 공야장(公冶長), 옹야(雍也), 술이(述而)에 138개의 글에 沃案, 朱熹集註, 集註沃案 순으로 풀이를 담고 있다. 독자는 도올의 치열한 학문연구 결과를 거저 먹는 듯하다. 모두 기억하고 실천함이 마땅하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새로운 관점을 몇 가지, 꼭 기억해 행하고 싶은 것을 옮긴다.     


팔일(八佾) : 예악의 주제를 중심으로 일관되게 편집

   ‘19세기 초 다산은 초당에서 일본 슌다이의 저작을 통해 진사이와 소라이의 학문 세계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였다. 우리의 선조들은 오히려 현재의 우리보다 훨씬 폭넓게 세계를 느끼려고 노력했다. 중국의 문헌과 일본의 문헌, 서양과학, 기독교의 문헌을 될 수 있는 대로 폭넓게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시제가 번거롭고 돈이 많이 들고 횟수가 만다는 투덜거림은 일요일 다 교회에 가는 것과 비교한다면 다시 생각할 일이다. 범순부는 ‘誠은 實이요, 禮란 본시 虛인 것이다.’라고 한다. 禮의 형식은 변하는 것이다. “是禮也”(내가 묻는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예다)

   주일의 개념은 고대 유대인의 창조 설화에서 유래, 이는 이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유래한 것이며 로마인들이 계승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1년에 1주 曆을 받아들였고 태양의 날(Sun-day)을 週의 시작으로 삼았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10일을 단위로 하는 旬의 개념을 썼다. 고대 사회에서 력은 제식이었고 문명의 질서였다. 윗사람을 비판할 때도 禮로써 할 줄을 알아야 한다. 음악은 孔門의 가장 중요한 배움의 주제였다. 관악합주곡, 壽齊天.

   子曰 ; “居上不寬, 爲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觀之哉?”(“윗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아니하며, 예를 행함에 공경스럽지 아니하며, 상에 임함에 슬퍼하지 않는다면, 내 그를 무엇으로 평가하겠는가?”)     


이인(里仁) : “이인편은 진정한 논어의 시작일 것이다.”

   이인편은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내면의 덕성을 주로 하고 있다. “里仁爲美”(리인위미, 인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다). 子曰: “惟仁者能好人, 能惡人”(유인자능호인, 능악인, 인은 심미적 감수성이다. 인간을 참으로 미워할 줄 아는 자만이 참으로 인간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사상에는 성악설이라는 것이 없다. 근원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관한 존재론적 규정이 없는 것이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선악의 규정은 중국인의 세계관 속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하지 못한 것을 증오할 줄 아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사회정의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子曰: “放於利而行, 多怨(방어이이행, 다원) 이익에 질질 끌려 행동하면, 원망만 많이 생겨날 뿐이다.” “讓양, 禮之主也”(사양이란 예의 근본이다)     

   자공의 질문 :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종신토록 실천하며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을 한마디로 해주세요)

   공자의 말씀 : “其恕戶! 己所不欲勿施於人”(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마라)

이는 공자철학의 정언명령이라 할 수 있다.

“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고자언지불출, 치궁지불체야, 옛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내지 않은 것은, 몸소 실천함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군자욕눌어언, 이민어행, 군자는 말을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 子游가 말하기를 “임금을 섬김에 너무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하고, 붕우 간에 너무 자주 충고하면 멀어지게 마련이다.”     


공야장(公冶長) : 인물평론집과도 같은......

   ‘공자가 자기 딸을 억울한 죄수에게 시집보낸 것이나, 수운이 광제창생의 뜻을 펴기로 작심한 후에 솔선수범하여 노비를 며느리로 삼은 것이나 다 상통하는 성인의 법도이다’

백옥의 흠은 오히려 갈아 없앨 수 있거니내 말의 흠은 갈아 없앨 수 없어라”(인간 언어에 대한 경계를 나타낸 시구다)

노자가 말하는 無爲之治(무위지치)란 :“함이 없음의 정치”다. 下學而上達(하학이상달)     

예기의 예운편 : 何爲人情? 喜怒哀樂愛惡欲, 七情弗學而能(사람의 정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희로애락애오욕을 일컬음이다. 일곱 가지는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할 수 있는 것이다.)

不恥下問(불치하문) :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기름養”과 “부림使”은 고대이래 오늘날까지 통치의 양대 측면이다. 기름의 원칙은 사랑, 부림의 원칙은 의로움이다. 즉 ‘백성을 부리는 명분이 적절하고 정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대 사회에서 정의의 개념이다.’ “지나친 공손이나 겸손은 모두 巧言令色과 상통하는 것이다.”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아니하고, 스스로 옳다하는 자는 빛나지 아니하고,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만하는 자는 으뜸이 될 수 없다.”(노자)

內自訟과 過則勿憚改는(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 같은 맥락이다.

공자의 삶에서 지고의 이상은 好學에 있었다.  

   

옹야(雍也) : 주희에 따르면 論古今人物賢否得失이라 규정함

   顏回에 대한 평: 불천노(不遷怒), 불이과(不貳過)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두 번 다시 반복하는 적이 없습니다.) 도올의 관점이다(“한 역사적 인간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었다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것도 대담한 결단을 요구하는 사태이지만,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다시 반복지 않는 것도 그 이상의 결단과 믿음을 요구하는 사태인 것이다.”)  “오로지 제도적으로 補不足을 통하여 續有餘의 결과를 이룩하는 것이 爲政의 正道이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배움의 길에 있어서,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무엇을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무엇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그 무엇을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종교의 질곡이 현실적으로 막중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직면하는 공자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 “공경하되 멀리하라!”

“學而不思則罔하고 思而不學則殆라”(학이란 박문의 세계요. 사란 약례의 세계다. 이 양자는 시간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시 동시적인 것이다)     


술이(述而) : 공자라는 인간의 파노라마다자신을 겸허히 말씀하신 것과 가르치신 말씀용모와 행사의 실제를 기록함

   子曰: “묵이식지黙而識之[문제의 발견], 학이불염學而不厭[끊임없는 탐구], 회인불권誨人不倦[부지런한 가르침], 何有於我哉!”(묵묵히 사물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배우며 싫증 내지 아니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아니 하니, 나에게 또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동방의 학문은 자각의 길이요, 자득의 길이다.’

   “보통 沐이란 머리만 씻는 것이고, 浴이란 모까지 씻는 것. 목욕을 하여 몸을 청결히 한다는 것은 성스러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염병을 제외하고서는 대부분의 내과적 질환은 나의 실존의 책임에 속하는 것이다. 질병이 발생했다는 것은 미생물이 탓도 아니며 병원이나 의사가 궁극적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다. 모든 질병은 나의 실존방식의 결과물이다.’

성서는 신앙의 대상이었지만논어는 교육의 주제였다.’

자온이려, 위이불맹, 공이안(子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 (공자께서는 따사로우시면서도 엄격하셨고, 위엄이 있으시면서도 사납지 않으셨고, 공손하시면서도 자연스러우셨다.) 도올은 말한다 “내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유가 도가 철학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모든 대립적 가치의 양면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공자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양면적 가치의 자연스러운 병존, 아니 융합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라고     



P.S.  <논어한글역주 2>는 2009년 1월 통나무에서 인쇄한 것으로 본문 623쪽 분량이다. 휴~     

작가의 이전글 논어 한글역주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