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세우고 걷는 행위와 생각하는 것은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 중 하나다. 생각,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철학을 발전시켜 왔던 사람들을 철학자라 부른다. 걷기와 철학자! 칸트가 걷는 시간에 태엽시계를 맞췄다는 일화가 진실인가 거짓인가를 구분하기 전에 떠오른다.
이동방법으로 걷는 행위가 자동차와 엘리베이터를 타고부터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매일 만보 걷기를 하려고 애쓰는 까닭은 하체를 튼튼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걷는다. 목표는 목표로 존재하고 월 2만~2만 5천 보를 걷는다. 걷는 과정에서 인사이트와 사고의 융합도 경험한다. 글 쓰는 기간에 걷기는 엉킨 실타래를 풀 듯 글감을 늘려주고 다듬기도 한다. 건강을 목적으로 걷다가 경험한 통찰은 걷기의 가치를 키워준다는 걸 수년 전 겨울에 경험했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이란 제목에 목차도 살펴보지 않고 구입한다.
전반부의 글 전개는 걷는 것을 조감하는 행위로부터 말하기, 글쓰기와 연계하려 한다. 조금은 억지스럽다. 인간이 걷는 행위를 아무리 철학자라지만 100여 페이지에 풀어가니 재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다만, 걷기, 산책이란 행위를 꾸준히 했던 철학자들을 소개하는 ‘세 번째 산책’과 ‘네 번째 산책’은 지식으로써 의미 있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밤늦게 출발할 만보 걷기를 할 일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고 60분간 걷다 왔고, 샤워를 마치고 독서 노트를 쓰도록 움직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은 네 개의 산책으로 구성했다.
프롤로그 : 로봇이 위험하고 정교한 일을 하지만 인간의 사소한 동작을 구현하기는 어렵다. 나이 들어감을 ‘세월의 타격’으로 표현한다. 이 책이 걷기, 말하기, 생각하기의 관계를 둘러싸고 구성되었음을 밝힌다. “말하는 건 걷는 것과 마찬가지로 추락이 시작되었다가 만회되고 다시 이어지면서 나아간다.” “생각하기와 걷기는 서로 닮았다. 생각 또한 불안정한 균형을 통해 나아간다. 무한히 균형을 잃었다가 되찾으면서 멀리 나아간다.” “철학은 걷기 방식과 유사한 존재 양식에 따라 이어진다. 넘어지면서, 넘어지는 걸 스스로 막으면서 무한히 반복하고 다시 시작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양식이다.”
첫 번째 산책 :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동굴의 비유는 “우리가 감각의 허상에 사로잡힌 포로들이며, 진실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인데 눈에 보이는 세계를 실제 세계로 여긴다는 걸, 진실은 저 너머 다른 곳에 있으며 우리가 찾아야 한다는 걸 알려주려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소요자’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아침 일찍, 때로는 몇 시간 동안 걸으며 성찰하고 말하는 습관이 있었던 탓이다. 회의주의자들은 미와 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기쁨과 슬픔은 어떤 확실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기에 선택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세상의 겉모습을 보고 이런 대비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뿐이다.
디오게네스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그는 집, 부인, 자식을 버렸고, 통 속에서 자고(이것만 알렉산더와의 일화로 알려져 있다), 신전에서 먹을 것을 훔치고, 사람들 앞에서 자위하고, 행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단다. 화폐도 위조했단다. ‘삶과 자연’만 존중했다고 한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연일 재판받고 교도소에 있어야 할 철학자다. 세네카 편에서는 로마에서 걸음걸이로 직업과 여자의 정숙함을 판단했다고 한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걷고 있다”
두 번째 산책 : 힐렐의 일화를 소개한다. “성서 전체를 한 문장으로 말해달라고? 문제없네.” 힐렐은 “사람들이 네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걸 네 이웃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토라 전체의 말이네. 나머지는 모두 해설이네. 이제 가서 공부하게나......” 공자의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과 다름이 없다.
간주곡 : “일반적인 생각의 차원을 떠나 철학적 생각과 그 고유한 방식에 몰두하면 걷기와 생각의 닮은 점이 분명해진다.” “명백한 사실들을 문제 삼지 않고, 확실한 사실로 믿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지 않는다면 철학도 없다.”
세 번째 산책 : 오컴이 활동하던 13세기 유럽은 모든 학자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라틴어로 말하고 읽었다. 오컴은 우리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존재하는 것을 처음으로 명백하게 구분하는데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나오기 600년 전이다. ‘오컴의 면도날’
몽테뉴는 서재에서 백 보를 걸으며 <수상록>의 텍스트를 받아 적게 하고 구술했단다. 루소는 “걷기에는 내 생각을 활기차고 생기 넘치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는 거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내 몸이 움직여야만 정신이 깃든다.”라고 말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산책을 예술로, 하나의 존재 방식으로, 거의 삶의 이유로 만든다. 어디론가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발견하기 위한 걷기, 이것이 혁신이다.” 산책을 예술로라는 구절은 젊은 연인들이라면 끄덕일 듯하다. 저자는 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쓴 원동력이 걷기에 있었다고 판단한다. 우리도 걸어야 한다.
칸트에게 걷기는 군대 같은 엄격함이 필요한 건강법이자 엄청난 작업을 하며 버티는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칸트가 생활유지를 위해 많은 시간을 역사학, 지리학, 문학, 법학을 강의해야 했기에 대단히 일찍 일어났고, 사시사철 일했으며, 매일 일이 끝나면 걸었다고 한다. 칸트는 혼자 걷기와 코로 숨 쉬며 걷기 방법을 썼단다.
데카르트, 디드로, 공자, 노자, 붓다, 헤겔도 많이 걸었던 사람이다.
P.S. 2018.7.3.(화)에 읽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