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주 시집
시를 감상하기에는 늦었다.
살면서 오르려고 애쓰고 나락으로 떨어져도 보니
감성은 호두껍질이 되고
방어벽만 촘촘하게 쌓고 있다.
더구나 비문학에 관심을 두고 읽고 쓰다 보니
시에 관해 간절함의 눈을 뜨지 못하고
‘대추 한 알’처럼 일체화하기도 남사스럽고
사물의 마음을 보지도 못한다.
고대 중국에서 詩人을 見者라고 했다는데, 나는 맹자(盲者)다
그저 사물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네 가지 틀은 감성의 눈뜨기(오감법), 관찰의 눈뜨기(오관법), 연결과 융합의 눈뜨기(오연법), 역발상의 눈뜨기(오역법)라는 지식만 취할 뿐이다.
두 달이 지나도록
시인 박용주에게서 선물로 덥석 받은 『수촌리 언덕』을 펼치지 못한다.
62편의 시를 담은 다섯 번째 시집은
불문학을 전공한 바탕이 있기에
‘내리꽂는’(p.15)을 통해
수촌리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백제의 왕자를 만나게 한다.
수세미의 일생을 아프로디테의 목소리 빌어 응원한다.
‘바쁜감’(p.26)은
사랑하기에도 바쁜데 미워할 시간이 없어야 한다는 시인의 마음이다.
‘아직도’(p.80)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여신과 뮤즈도 다녀간 수촌리에 다녀가라는 초대다.
눈부신 유방으로부터 하얀 젖이 쏟아지고
들판은 금빛으로 출렁이며
정안천 위로 물안개 풀풀 피어오르는데,
태실에서 오룡 가는 길
술 취한 코스모스들 몸을 못 가누고
들깨 향은 고양이처럼 밭둑을 넘어오는데.
탱탱하게 발기된 대추 알 사이로
풀벌레들은 밤새 천상을 오르내리고
자진모리 풍장소리 동네를 뒤흔드는데,
수촌리 언덕에 아직도 초대받지 못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