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지음
퇴직한 직장 상사 한분이 “이젠 문학만 읽으련다.”라고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았다. 몇 해 전 일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을 빼고는 세상살이와 거리를 두겠다는 뜻이었는지, 살아보니 이전투구하는 삶에 싫증이 났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아직 독서 방향을 한 가지로 정하기 않았다.
올해에 처음으로 읽은 소설이 <내 이름은 빨강>이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오르한 파묵의 2001년 작품이다. 터키 이스탄불에 살고 있고 소설의 배경도 같다. 그곳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케말파샤 이후 터키의 세속주의와 이슬람이 불안하게 동거하는 상황이다. 소설이 작가의 삶을 떠날 수 없다더니 <내 이름은 빨강>은 원근법을 둘러싼 찬반이 시도되는 시점이다.
16세기말 오스만제국 수도 이스탄불의 궁정 화원에는 중국, 인도의 화풍을 포섭한 세밀화가 정통이 된 지 오래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에니시테가 베네치아의 화풍인 원근법을 세밀화에 시도한다. 원근법의 도입 여부가 신성 모독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갈등구조가 소설의 바탕에 깔려있다. 궁정 화원장인 오스만과 대척점에 있는 에니시테가 술탄의 지원을 받아 원근법을 사용한 세밀화를 그려간다. 나비, 황새, 올리브, 엘레강스라는 세밀화가와 금박장인은 에니시테의 집에서 지도를 받아 그림의 마지막장 완성을 앞둔 상황이다. 그러나 금박장인 엘레강스가 살해되고, 에니시테도 살해된다. 이 시점부터 카라와 여인 셰큐레의 러브 스토리는 살인자를 찾아가는 추리 소설이다. 끝부분까지 살인자가 누구일까?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한다. 소설 중간에는 살인자를 추정할 실마리가 전혀 없다.
목숨을 건 사랑이야기라는 출판사의 설명은 내겐 설득력이 약하다. 미망인 세큐레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아름답다고는 하나 첫 남편은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하고, 살인자 올리브가 사랑했음을 눈치채지 못했고, 시동생의 사랑과 욕정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시동생 하산은 올리브를 죽였기에 이스탄불을 떠나야 했다. 12년간 첫사랑을 잊지 못해 떠돌다가 돌아온 카라는 셰큐레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지만 동침의 조건으로 아내가 제시한 수많은 조건을 맞춰야만 했다.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어깨에 칼을 맞아 우울한 분위기 속에 소설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했다.
등장인물들이다.
에니시테와 딸 셰큐레, 하인 하이리예, 아들 셰브켓과 오르한, 그리고 카라
셰큐레의 남편과 시아버지, 시동생 하산
궁정화원장 오스만과 세밀화가인 나비, 황새, 올리브, 금박장인 엘레강스
유대인 방물장수이자 중매쟁이 에스테르
오르한 파묵의 표현 몇 가지
- 에니시테 : 내 나이쯤 되면 진정한 존경심이란 가슴에서가 아니라 사소한 예의범절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부터 우러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p.49). 나이 먹음의 또다른 정의다.
- 카라 : 그녀를 향한 사랑 때문에 혈기왕성했던 시절의 내가 얼마나 낙관적으로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았는지를 깨달았다.(p.66) 사랑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지......
- 셰큐레 : 정말로 불행한 일은 늙어서 추해지고 남편이 없거나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나를 질투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p161). 여자란 남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 에스테르 : 슬픔이나 이별, 질투, 외로움, 적대감, 눈물, 소문 그리고 영원히 되풀이되는 가난 같은 건 집안 살림살이들처럼 항상 서로 비슷하답니다.(p.238). 알고 보면 우환이 없는 집은 없다더라.
- 셰큐레 : 왜 시인들은 남자의 물건을 ‘갈대로 만든 연필’이라고 했을까요?(2권 p343). <그리스인 조르바>에선 여성의 성기를 ‘아물지 않는 상처’라.
많이 등장하는 세밀화는 쉬린이 휘스레브의 그림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민음사에서 2004년 모던 클래식 첫 편으로 이난아 님이 번역해 본문 약 700여 쪽 분량으로 내놓았다. 독자는2015년 2판 11쇄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