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를 만끽하고 있던 중 문득 과거에 함께 일했던 사람이 생각났다. 방정맞은 행실을 가지고, 과한 오지랖을 부렸던 그 사람은 내게 있어서 가벼움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나는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내가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사람의 가벼운 입 때문이었는데, 그는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다가가 은근슬쩍 비밀을 캐묻고, 이를 여러 사람들에게 "이건 비밀인데요."라며 알리고 다니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저런 게 천성인가 보다 하며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생각 없이 뿌리고 다니는 것이 심해지자 직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잠잠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당신이 내 뒷담화를 하고 다닌다면서요? 다 들었거든요?" 라며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얼굴을 붉히거나 업무가 정체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 상황에서 싸움을 일으킨 장본인인 그 사람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상황. 나아가 이 사람은 싸움이 난 두 직원 사이를 오고 가며 "저 사람 진짜 얄밉죠?"라며 이중스파이 같은 짓을 일삼았는데, 속이 상해있는 사람에게 친구인척 다가가 다시금 약점을 파헤치는 모습에 나는 경악하며, 그때부터 이 사람을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렇게 싱숭생숭한 분위기의 직장에서 조용히 업무를 하며 보내길 몇 달. 며칠 뒤면 근로계약 기간이 끝나서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내게 그 사람의 검은 손길이 결국 뻗치고야 말았다. 사실 이전에도 다른 직원들에게 하듯 나에게 "00쌤은 싫은 사람 없어요?"라며 묻거나 "옆부서에서 업무 몰아주는 거 진짜 싫지 않아요?"라며 꼬치꼬치 캐물었던 그 사람. 그럴 때마다 나는 '괜히 또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려고 하네'라고 생각을 하며 매번 "저는 그런 거 없어요."라며 흘리듯 대답했는데, 다른 사람들처럼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 나에게 그동안 심술이 났던 것인지, 퇴근을 하던 그날 그 사람은 나의 뒤를 몰래 쫓아왔다.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나는 돌아보았는데, 그 사람은 숨을 헐떡이며 잠시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고 내게 제안을 했다. 내가 타는 전철은 하나를 놓치면 30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나는 전철의 배차시간이 신경 쓰였으나, 이리 다급하게 불러 세운 거면 중요한 일이겠거니 싶어 역 근처 공원으로 걸어가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숨을 어느 정도 골랐다고 생각 됐을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쌤 방금 마치는 시간 되자마자 바로 퇴근하셨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라며 내게 이상한 경고를 했다. 나는 무슨 의미인가 싶은 마음에 고개를 갸웃하며 "제가 오늘 마감 당번도 아니고, 업무 시간도 끝난 뒤에 나온 건데 괜찮지 않습니까? 부장 선생님께는 전철 시간 때문에 바로 퇴근하겠다고 양해까지 구하고 나왔는데요?"라고 잔잔하게 설명했다. 흠잡을 것이 없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상황. 그러자 그 사람은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씩씩대며 이상한 말을 내게 던졌다. "근데 예전에 쌤은 다른 분들이 좋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부장 선생님도 그렇고 다른 쌤들도 그렇고 쌤 싫어하는 사람 많아요!".
나는 뜬금없이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가 뭔지, 또 그렇게 소리를 칠 필요가 있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는 가까이서 이 사람의 행실을 쭉 봐왔기에, 이 말이 또 다른 이간질의 시작이겠거니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굳이 반응해주지 않기 위해 "싫어하셔도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죠 뭐."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내가 평온한 모습으로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게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무언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말에 분노하거나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내가 충분한 리액션이 없으니 점점 조급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후 그는 직장 내에서 나에 대해 떠도는 소문이 있는데 궁금하지 않냐 라던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느냐는 주제로 쉴 새 없이 내게 미끼를 던졌으나, 나는 시종일관 "괜찮습니다. 모두에게 다 좋은 사람일 수는 없죠."라며 대화를 끊어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 봐야 아무런 영양가가 없겠다는 판단이 드는 상황.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자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지금 왜 이렇게 눈총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거니와 무의미한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퍽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철이 곧 있으면 온다는 말을 하고서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내일 뵙겠습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돌아섰던 나. 그 사람은 닳아 오른 압력밥솥이 펑하고 터지듯, 나의 뒤통수를 보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 바닥 좁아요! 잘 행동해야 한다고요!".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유도한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내 삶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왜? 그 순간 나는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그 사람의 모습이 조금은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리곤 아까와 같이 빙긋 웃으며 "괜찮습니다. 또 만나게 되면 그때 또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후 점점 멀어지는 나에게 "진짜라니까요? 제 말 들으셔야 한다고요!"라며 그 사람은 계속 소리쳤지만, 나는 허허 웃음소리만 내며 역사로 걸음을 향했다. 곁눈으로 본 것이지만 내가 완전히 안 보일 때까지 그 사람은, 멀리 도망간 먹잇감을 보는 악어마냥 제자리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후일담이라고 한다면 그 이후 함께 일했던 직원분과 공익요원이 내게 연락을 해와서, 그 사람이 이상한 것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던 탓에 부담이었다고. 또 조용히 얘기한 걸 온 천지에 소문을 다 내서 진짜 내 얘기하는 게 싫었다고 말해주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시간은 돌고 돌아 지금의 나는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고 있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지금 떠오른 것은 아마도, 그때 그 사람이 내게 했던 말들이 결국은 무의미했구나를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무언가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결국 지금의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온 덕분에 평온함을 찾았고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나는 이 경험을 교훈 삼아, 나이가 들게 되더라도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반성한다. 나아가 내가 가진 기준이 곧 성공을 향한 지름길이라 생각지 않으려 한다. 이 바닥은 좁지만, 이 세상은 넓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