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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원피스에서 주인공 루피가 쓰는 기술인 기어 세컨드를 아는가? 기술 이름을 외치는 순간 체온이 급상승하여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몸에서 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 나는 이런 신기한 모습이 만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평범한 일반인도 똑같은 비주얼을 낼 수 있다는 걸 동계훈련을 통해 알게 되었다.
대학생 3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 시기. 나와 동기들은 TMO(국군수송지원반) 열차를 타고 괴산으로 향했다. 당시 날씨는 무척이나 추웠는데, 조금만 서있어도 추위가 군화를 뚫고 발끝까지 들어와 동상을 일으킬 정도였고, 전투복 위에 입는 방상 내피(일명 깔깔이)와 방상 외피(일명 야상으로 불리는 군용 점퍼)는 거의 무용지물 수준이었다.
학군교에 잘 도착했음을 알리는 입소식을 끝내고 여차저차 맞이한 다음날 아침. 새벽 여섯 시 반에서 1초의 오차도 없이 기상나팔이 울렸고, 생활관에 있던 동기들은 번개와 같은 속도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해가 늦게 뜨는 겨울이라 그런지 주변은 무척이나 어두웠고, 이제 막 모포(군용 담요)를 떨치고 나와서 그런지 바깥의 날씨는 냉동고 안에 들어온 듯 차가웠다. 다들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대열을 맞춰가고 있는데 그 순간 앞에 있던 교관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원! 상의 탈의!
지금도 얼어 죽을 지경인데 상의탈의라니. 나는 속으로 미쳤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추위보다 무서운 것이 교관의 불호령이었기에 이내 동기들은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 옷을 벗을 때마다 더 살갑게 느껴지는 겨울바람. 손끝의 감각도 서서히 둔해지며 이제 곧 덕장에서 말린 동태가 되겠구나 싶었는데, 그 순간에 교관은 우리에게 뜀걸음을 하라고 지시했다.
몇 킬로미터를 뛰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학군교 앞을 달려야만 했던 나와 동기들. 짙은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앞선 동기의 등과 입에서 나오는 새하얀 입김뿐이었다. 뜀걸음이 지속될수록 코 안과 속눈썹에는 서리가 맺혀갔고, 가슴은 더욱 뜨거워져 갔다.
얼마를 뛰었을까? 교관의 "그만!"이라는 지시에 우리는 다시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숨 고르기를 했다. 그런데 이때 생전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주변에 있는 모든 동기들의 몸에서 만화 장면과 같은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몸에서도 수증기가 피어올랐는데, 나와 동기들은 신기하다면서 서로를 계속 쳐다보았다.
오~! 기어 세컨드
대열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 나는 "기어 세컨드"라는 말에 만화 속 장면이 생각나 그만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물론 우리들의 웃음소리는 정숙하라는 교관의 호령에 곧장 사그라들었지만 묘한 행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막사로 돌아가 짧은 개인 정비를 하고 시작된 하루. 이제는 추위가 두렵지 않았지만 앞으로 다가오게 될 악몽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