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러시아)
당시에 러시아는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슬로건이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났다. 그중에서도 비행기가 아닌 배편을 통해서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동해항을 통해서 러시아로 출발했다. (현재는 동해-러시아 배편이 운행하지 않음.)
마음을 비우고 싶은 마음에 홀로 떠났던 여행. 간단한 출국절차를 마치고 대합실로 나가자 거대한 크루즈선이 나를 반겼다. 내가 구매한 가장 저렴한 객실인, 2층짜리 간이침대에 짐을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선내에는 매점, 노래방, 목욕탕, Bar 등 다양한 즐길거리들이 있었다.
출발 시간은 10월 6일 오후 2시경. 안내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꼬박 24시간이 걸린다고 하여 나는 간단하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먼바다로 나가자 파고가 높았던 탓인지 배가 바이킹 놀이기구처럼 앞뒤로 넘실넘실 흔들렸는데, 멀미약을 먹었음에도 뱃멀미가 심하게 왔다. 그래서 식사를 하라는 방송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아픈 사람처럼 골골거렸는데, 함께 배를 탔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술을 마시거나 선내 클럽으로 가서 춤을 추셨다.
핸드폰이 제대로 터지지 않아서 핸드폰 시계로만 얼추 시간을 확인하며 누워 있었는데, 드디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얼른 바깥으로 나가 주변을 구경했는데, 투박해 보이는 항구 건물과 낯선 글자들을 보는 순간 여기가 러시아라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입국 절차는 러시아 사람부터 먼저 받기 시작했고, 그다음으로 외교관, 사업가, 일반 관광객 순으로 받았는데 출국을 할 때처럼 입국 또한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항구를 벗어난 직후 나는 버스를 타고 인근에 있는 S-56 잠수함 박물관으로 갔다. 잠수함 박물관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실제 잠수함을 가져와서 만든 것으로 내부에서는 실제 승무원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게끔 되어있었다. 잠수함 박물관 뒤편으로는 전쟁 전쟁영웅들의 이름과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도 관련 유족들이 와서 기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에는 주변을 조금 산책했다. 거리 중간에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을 기념하는 개선문이 있었다. 개선문은 1891년에 세워졌다가 철거된 뒤 2003년에 다시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개선문이 무척이나 번쩍거렸다.
이후 바닷가 인근을 걸었는데 지나가는 차들도 그렇고 대부분이 일본회사의 차들이 많았다. 얼핏 들었던 이야기로는 러시아에서 차량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자동차 회사가 경쟁을 했었는데, 결국에는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시동이 걸린 일본 차량이 최종 발탁되어 도입이 되었다고 한다.
잠수함 박물관 옆, 작은 성당 앞에는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러시아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영원의 불꽃은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군인들과 이름 없는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1941년에 불이 붙은 이후 한 번도 꺼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천연가스가 풍부한 나라라서 그런지 러시아 전역에는 이런 영원의 불꽃이 수천 개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그중 20%만 유지가 되고, 나머지는 기념일이나 특정한 날에만 운영이 된다고 한다.
이후에는 버스를 타고 이동한 뒤, 도보로 육교와 언덕을 올라 전망대로 향했다. 흔히 '독수리 전망대'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시원하게 뻗은 졸로토이 대교, 그리고 금각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조금 더 시선을 돌리면 저 멀리 떨어진 루스키 섬이 함께 보인다.
숙소는 블라디보스토크역 인근인 '젬주치나'라는 곳에 묵었다. 숙소는 비교적 깔끔했는데, 화장실에 바닥에 배수구가 없다는 점이 우리와 조금 달랐다. (샤워는 별도의 샤워부스를 활용해야 했다.)
나는 보통 숙소에서 사진을 잘 찍지 않지만 저 날은 꼭 사진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진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10월에 창 밖으로 눈이 내렸던 것이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관광객들도 눈이 온다면서 아우성이었고, 나는 잠이 들기까지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조용히 바깥으로 나갔다.
좁은 인도를 따라 걸으니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메텔과 다른 캐릭터들이 보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훤칠한 러시아 사람들이 이리저리 밤을 누비고 있었다. 나는 선물용 보드카를 사기 위해 여러 큰 도로를 지났는데, 그 중 아르바트 거리에는 술에 취한 청년들이 있어서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