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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Feb 04. 2021

어두울수록 작은 빛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에세이]


 스무 살 중반에 갓 들어섰을 무렵의 겨울, 나는 동기들과 함께 장교 후보생들이 치르게 되는 고된 겨울 훈련을 떠났었다. 한창 멋을 부리고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고, 이곳저곳 한참 여행을 다녀야 할 시기에, 핸드폰도 쓰지 못하고, 매점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며, 잠을 자고 일어나는 시간까지 통제되는 환경 속에서 버텨내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안개가 뿌옇게 내려앉은 새벽에 일어나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연병장을 몇 바퀴나 돌았고, 아침밥을 먹고 돌아오면 시간에 쫓기듯 다시 군장을 싸서 멀리 있는 훈련장으로 멀리 떠났다가 해가 질 무렵 돌아오는 것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식사의 부식으로 나왔던 콜라 한 캔과 초콜릿바 하나가 나에게 어떤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대학생의 신분으로서 초콜릿바와 콜라는 그저 편의점에 가면 볼 수 있는 흔한 간식이라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겠지만 이곳에서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매점의 이용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먹을 수 있는 간식이나 음료는 부식으로 제공되는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이렇게 부식으로 나온 평범한 간식이 내겐 너무 신기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너무 달다는 이유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초콜릿바를 떨리는 마음으로 한입 베어 물자 화로 위에 떨어진 눈송이 마냥 초콜릿은 혓바닥 위에서 녹아내렸고, 콜라 또한 바싹 마른 모래에 물 한 컵을 붓는 것처럼 순식간에 모두 목구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선 생각했다. 지금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버킷리스트에 적어 훈련이 끝나면 모두 이루어 보겠다고.


 매일 밤 일과가 끝나면 자기 전 버킷리스트에 그날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한 줄씩 남겼는데, 내용들은 하나 같이 사소했다.

- 초코바를 한 상자 사서 다 먹을 것

- 1.5L짜리 콜라를 사서 원샷해 볼 것

- 밤을 새운 후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잘 것

- 맥주 한 캔을 사서 바다를 바라보며 마셔 볼 것.

- 운동화를 신고 10km를 산책해볼 것.

- 편지를 써준 친구를 만나 밥을 살 것.

- 커다란 공책을 하나 사서 빽빽하게 글을 써볼 것.


 길었던 훈련이 끝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 동안 써두었던 버킷리스트를 모두 이루게 되었다. 물론 초코바는 고작 세 개 밖에 먹지 못했고, 콜라 역시 반도 채 비우지 못하고 끝나긴 했지만 그 외에는 모두 바라던 만큼의 결과를 달성하게 되었고, 하나하나를 시도할 때마다 너무나도 행복했다.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끝내던 날 저녁, 침대에 누워 만족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내가 훈련이라는 상황을 겪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런 일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이 일들이 이 만큼 나에게 행복을 주었을까?'라고.


 이후 나는 이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든 일이 생기거나 무언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환경에 처할 때면 습관처럼 속으로 이런 말을 되뇌곤 한다. '어두울수록 작은 빛은 더 선명히 보이는 법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힘들지만 이런 고된 경험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나 사소했던 소망들은 오히려 더 선명히 빛나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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