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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Oct 26. 2021

바리스타 (1편)

 20대 중반을 지나갈 무렵, 한 해가 가기 전에 무언가 이정표를 남길만한 게 없을까를 생각했다. 어학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성미에 안 맞았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나 글을 적는 것은 이미 하고 있으니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 대학생이던 시절 친구들에게 장난으로 북카페 같은 걸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문헌정보학과 출신이면 한 번씩 하는 흔한 농담) 고민을 하던 찰나에 문득 그 말이 떠오른 것이다. 책은 어차피 지겹도록 마주하고 있으니 커피를 배워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나를 바리스타 학원으로 이끌었다.


 내가 살던 곳 인근에 유일하게 바리스타 학원이 하나 있었다. 꽃다운 청춘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대학로에 위치한 학원은 스무 살의 젊음을 입은 듯 분위기가 산뜻했다. 작은 화분들이 놓인 넓은 플로어와 커피 향이 가득 나는 휴게 공간이 있고, 실습을 위한 주방에는 (원장님의 말로는) 500만 원이 넘는다는 붉은색 고급 에스프레소 머신 두 대와 형형색색의 커피 관련 도구 다수. 그리고 모든 식기들을 담아도 넘치지 않을 만큼의 싱크대가 구석에 마련되어 있었다. 학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40대 중반의 유려한 말씨를 자랑하는 원장님과 커피와 관련된 무수히 많은 대회에서 입상을 한 젊은 남자 강사 한 분이 반갑게 맞이를 해주셨다. 내가 학원을 등록하던 때가 마침 학원에서 자격증 취득생을 모집하던 시즌이어서 주부 수강생분들도 여럿 배우러 오셨는데 10명 남짓 되는 교육생 중에는 나 혼자만 유일하게 남자였고 나이가 가장 젊었다.(그래서 여기저기서 이쁨을 많이 받았는지도 모른다.) 원장님의 간단한 학원 이력 및 교육과정 설명이 끝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강사님이 내려주신 커피 한 잔을 옆에 끼고 이론 수업을 들으며 필기시험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커피에 대해서 책으로 공부를 하는 것은 조금 생소했다. 다른 자격증 시험도 그렇듯이 바리스타 시험도 필기, 실기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두꺼운 책을 펴고 커피에 관한 세세한 정보들을 암기하는 것은 무언가 어색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카페에 갔을 때는 커피가 대충 몇 가지가 있겠거니 싶었는데, 커피에 대해서 배워나가자 커피의 품종이 다르고 맛이 다르고 추출 방법도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달여 뒤에 있을 필기시험은 각자의 노력에 맡기고 학원에 등록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나는 바로 실습에 들어갔다. 처음엔 실습이라 하기에 주방에서 우웅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던 에스프레소 머신을 바로 다룰 줄 알고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아쉽게도 나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내 앞에 놓인 것은 크기도 형태도 제각각인, 기계 이전에 등장한 커피 추출 도구들이었다. '와 이렇게도 커피가 만들어지는구나'하며 신기했던 순간이 참 많았지만 그중 기억에 남거나 특별했던 도구들의 정보를 몇 가지를 남겨볼까 한다.


1. 모카포트

 생김새는 철로 모래시계를 만들고 거기에 손잡이를 단 것처럼 투박하게 생겼다. 크기는 아랫부분을 손으로 쥐면 손바닥에 폭 들어올 만큼 약간 작은 크기에 속했다. 추출 방식은 증기압을 통해서 커피를 뽑아내는 형태였는데, 아래쪽 공간에는 물을 넣고 가운데 깔때기처럼 생긴 커피 바스켓에 커피가루를 담는다. 그 후 손잡이가 달린 윗부분을 잘 결합하여 가열하면 뜨거운 수증기가 가운데 커피를 거쳐 위쪽 공간으로 솟구치게 되는데, 위쪽으로 좁게 난 추출구를 보고 있으면 작은 화산이 분화하는 것처럼 커피가 튀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커피의 농도는 높은 압력을 가진 수증기가 빠르게 커피를 통과하면서 추출되는 형식이기에 약간 진한 느낌이 든다.


2. 사이펀

 어릴 적 과학실에서 실험을 즐겁게 해 본 사람이라면 굉장히 익숙하게 보일 수도 있는 도구이다. 스탠드 조명 같은 고정 도구가 하나 있고 한라봉 하나가 느긋하게 들어갈 것 같은 크기의 둥근 플라스크 두 개가 입구를 맞대고 모래시계 형태로 고정이 되어있다. 추출방식은 모카포트와 비슷하게 아래에서 물을 가열해서 수증기를 만드는 형태지만, 위쪽 공간에 커피가 남는 모카포트와는 달리 사이펀은 위에 쌓인 수증기가 물방울 형태로 모인 후 다시 아래로 흘러내려오면서 커피가 추출이 된다. 추출이 완료된 아래쪽 플라스크를 분리해서 흔들어보면 약간 과학자가 된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는데 농도는 커피메이커로 만든 커피와 비슷한 중간 정도의 느낌을 준다.


3. 프렌치 프레스

 프렌치 프레스는 주사기와 약간 느낌이 비슷하다. 유리로 된 커다란 컵에 커피와 뜨거운 물을 부은 후, 여과기(거름망)가 달린 뚜껑을 덮어 아래로 꾹 눌러주면 커피 가루는 아래로 가라앉고 추출된 커피만 위로 뜨게 된다. 물론 한 번 눌러주는 것으로 진한 커피가 추출되는 것은 아니기에 두세 번 여과기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커피 추출 농도를 맞춰준다. 프렌치 프레스가 특이한 것은 커피가 아닌 우유를 넣었을 때 우유 거품을 만들 수가 있는데 이것은 사용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농도는 물의 온도가 어떻게 되느냐와 농도 조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지만 보통은 약간 연한 정도의 느낌을 준다.


4. 핸드드립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무언가 커피 한잔의 품격과 여유로움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핸드드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방법은 간단하다. 가장 아래에 추출된 커피가 담길 컵을 놓고 그 위에 추출 틀을 놓는다. 역삼각형으로 생긴 추출 틀 공간 안에 필터와 가루 커피를 놓으면 준비는 끝. 뜨거운 물을 끓여 주전자에 담고 그 위로 부어주면 된다. 사실 핸드드립용 주전자는 주둥이가 길고 얇은 게 특징인데 이는 물을 정확하게 얇게 떨구기 위함이다. 건조가 되어있는 원두에 뜨거운 물을 들입다 붓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약간 커피 전체를 적셔준다는 느낌으로 물을 붓게 되는데 이때 1차적으로 커피 안에 있던 가스가 올라오면서 커피가 부풀게 되고, 적당히 부풀었을 때 다시 물을 부어 추출을 마무리하면 된다. 가끔 물을 커피가 아니라 필터에 붓게 되면 커피에 종이 맛이 우러날 때가 있는데, 이처럼 추출 위치나 방법 같은 것도 핸드드립을 할 때 참고하면 좋은 사항이라는 생각이 든다. 농도는 추출한 후 따로 가열하지 않아 조금 차가운데, 그 때문인지 연한 느낌을 준다.


5. 더치커피 (메이커)

 사이펀과 같은 실험실 커피의 2탄이라고 볼 수 있다. 기다림의 정수라고 부를 수 있는 더치커피는 메이커의 가격도 상당할뿐더러 추출되는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는 방법으로 보통은 카페에서 판매하는 형태로 접하게 된다. 메이커는 보통 높이가 1M 이상이 되는 고정대에 커다란 플라스크 세 개가 수직으로 놓여 있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미 커피를 즐겨마시는 사람들이라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커피 추출방식의 하나이기도 하다. 추출되는 모습은 병원에서 링거를 맞을 때처럼 위쪽 플라스크에서 차가운 물이 한 방울씩, 가운데 놓인 커피로 떨어지게 되고 이 물방울들이 다량의 원두들을 거쳐 다시 아래쪽 받침 플라스크로 한 방울씩 추출되는 형식이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수어 시간도 걸리는 커피이다 보니 집에서 만드는 것은 비용 측면에서나 시간적인 측면에서 약간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농도는 상온이나 차가운 물을 가지고 추출하기 때문에 연하다.


6. 체즈베

 체즈베란 터키식 커피를 제조하기 위한 손잡이가 달린 작은 냄비를 일컫는 말로 체즈베로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은 매우 고전적이면서 쉽다. 냄비 안에 고운 커피 가루와 물을 부은 후, 달고나의 설탕을 녹이듯이 냄비를 데웠다가 식혔다가를 반복하면 된다. 다만 가열이 빠르게 되다 보니 식히는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커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넘치게 되는데 자칫 옷이나 피부에 튀면 화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점을 조심해야 한다. 터프한 느낌으로 팔팔 끓여 바로 마시는 커피답게 농도는 매우 진한데, 마시고 난 후에 잔에 남은 커피 가루를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다양한 추출 도구들의 사용법을 익히고 난 이후에는 로스팅에 대해서 배우고 실습을 했다. 로스팅이란 커피 원두(생두)에 열을 가하여 가공하는 과정으로 커피가 가진 맛이나 특징을 살려내는 매우 중요한 작업으로 손꼽힌다. 로스팅의 단계는 각 나라별로 다양하긴 하지만 나는 8가지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방법을 배웠다. 라이트 로스팅부터 풀 시티 로스팅까지 각 단계에서 느껴지는 맛은 차이가 있으나 이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생략하기로 한다. 로스팅은 보통 커다란 기계로 적당한 열을 가하여 균일하게 원두를 제조하게 되지만 나의 경우는 판매를 위함이 아닌 실습을 위한 로스팅이다 보니 철제 망에다가 생두를 놓고 불에 직접 가열하는 방식으로 간단하게 진행을 했다.


 10원짜리 동전의 반 정도 되는 크기로 노랗게 빛나는 생두를 볶다 보니 1분 정도 뒤에 생두 겉면에 붙어있던 껍데기나 찌꺼기(파치먼트)들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후 웍으로 볶음밥을 하듯 생두 전체에 열을 고르게 계속 가해 주다 보면 어느 순간 팝콘이 터지는 것처럼 '퍽'하는 소리를 내며 순간 2배 가까운 크기로 커지게 돼 된다. 터질 때의 진동은 꽤나 커서 손끝으로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불 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던 원두들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한 번 몸집이 커진 원두를 계속 가열하면 황갈색에서 진한 갈색으로, 그리고 우리가 음식을 오래 조리했을 때처럼 검은색 빛깔을 띄게 되는데, 이때 맡을 수 있는 진한 원두의 향과 반질반질한 표면을 보고 있으면 왜 그리도 사람들이 커피에 열광을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웠던 로스팅 실습이 끝난 후 드디어 나는 2주 전부터 애타게 나에게 손짓을 하던 에스프레소 머신을 다루어보게 되었다. 머신은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기 위한 뜨거운 물과 스팀밀크를 만들기 위한 고압 수증기가 나오기 때문에 위험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숙련이 되면 어떤 추출 기구들보다 커피를 뽑기가 편했다.(가격이 그만큼 비싸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계는 대략 4가지로 구분된다. 1. 그라인더(믹서기)로 원두를 곱게 갈고 2. 갈린 원두를 포타 필터(커피를 담는 공간)에 담아 3. 탬핑(누르기 작업)을 한 후, 4. 포타 필터를 머신에 연결하여 추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포타 필터의 추출구에서 에스프레소가 나오는데 추출구의 수에 따라서 하나의 잔으로 추출되거나 두 개의 잔으로 추출이 가능하다.(나는 주로 2개로 추출이 되는 필터를 썼다.)


 다만 이렇게 에스프레소를 뽑기가 간단함에도 절차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신경을 쓰지 않게 되면 커피맛에서는 확연하게 그 문제점이 드러났다. 원두를 갈 때는 원두의 보관 상태나 입자 크기를 잘 확인하지 않으면 냄새가 나고 추출 시에 문제가 발생한다. 갈린 원두를 담을 때는 너무 많은 양을 담을 시 포타 필터가 머신에 결합이 되지 않게 되고, 반대로 적게 담는 경우 추출할 때 에스프레소가 연하게 뽑히게 된다. 탬핑을 할 때는 수직으로 적당한 힘을 주어 원두가루를 눌러주어야 하는데, 기울어진 상태로 누르면 커피 추출이 제대로 되지 않고, 너무 세게 누르면 물이 원두 사이를 빠져나오지 못해 추출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된다. 끝으로 추출 시 머신 내부의 압력이나 온도를 확인해야 하는데, 예열이 안 된 상태로 추출을 하게 되면 커피의 맛이 떨어지게 된다.


 나와 더불어 처음에는 다들 실수도 많고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커피 가루를 여기저기 흩뿌리지를 않나 추출 정지 버튼을 늦게 눌러서 에스프레소를 한가득 추출해버리지를 않나 다들 며칠 동안 멋쩍은 웃음을 짓기 일수였다. 머신 실습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바뀐 것은 사실 기술보다 나의 커피 입맛이었다. 실습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에스프레소가 넘쳐나게 되는데 원장님의 권유로 나는 매일 2L에 가까운 에스프레소를 개인 보온병에 담아서 가져가곤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아메리카노 조차 너무 쓰다면서 기피했던 나였는데 학원을 다니면서 에스프레소를 물처럼 마셔대다 보니 아메리카노가 맹물처럼 느껴지게 되고만 것이다. (요즘도 가끔 에스프레소를 시키긴 하는데 사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에스프레소를 시키면 이상하게 보는 시선들이 있어서 시킬 때마다 눈치가 보이곤 한다.)


 에스프레소를 이제 능숙하게 뽑을 수 있게 될 무렵 나는 머신 활용의 다음 단계로 능숙해지기가 참 어려웠던 스팀밀크를 치게 되었다. 에스프레소의 경우 버튼만 눌러서 기다리면 되었지만 스팀밀크는 진정 손기술이 많이 요구되었다. 스테인리스로 된 스팀밀크 피쳐에 차가운 우유를 붓고 스팀 배출구 입구가 약간 잠길 정도로 가까이 댄다. 이후 배출 레버를 돌려 배출구로 나온 수증기로 우유를 천천히 데우게 되는데 이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레버를 너무 약하게 돌리면 열이 전달되지 않았고, 너무 세게 돌리면 우유가 거품이 생기기도 전에 과하게 익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배출구를 너무 깊게 잠기게 하면 우유가 순환하지 않고 데워지기만 하고, 반대로 우유 표면에 너무 가깝게 두면 밖으로 왈칵 튀거나 게거품이 생겨나곤 했다. 최적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에 다른 과정보다 더 공들이고 집중을 했던 게 스팀밀크를 칠 때였던 것 같다.


 근 두 달에 가까운 커피 여정. 어영부영 필기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나는 이제 가장 먼저 학원에 도착하여 제집인 것처럼 기구들을 찾아 실습을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쯤 되자 원장님이나 강사님도 내가 실습을 할 때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일을 하셨는데 나는 '나를 믿어주는구나'하며 뿌듯함이 생기면서도 한 편으로는 어떤 부담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이유는 실기시험을 바로 문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2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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