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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Dec 31. 2021

옥탑방의 낭만

 대학교를 다니던 스무 살 중반 무렵. 나는 통학이 힘들다는 이유로 학교에 기숙사를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학교로부터 당차게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1개 동뿐이었던 기숙사 건물의 물리적인 한계도 있지만 기숙사를 원활히 굴리기 위한 독특한 내부 규정 때문이었다. 입학생을 늘리기 위해 기숙사 전체 인원 중 90%를 신입생(혹은 1학년생)으로 우선 배정하고 나머지 10%를 2~4학년들이 할당받는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TO를 점점 적게 적용함에 따라 성적 우수자 또는 교수 추천서를 받지 않는 이상 고학년은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찌 됐건 기대했던 한줄기 희망이 사라지자 나는 앞이 막막했다. 친구들도 모두 기숙사를 들어가지 못했기에 함께 방을 구해볼까 했지만, 미래를 빠르게 예견한 그들은 삼삼오오 팀을 짜서 방을 계약한 지 오래였고, 몇몇은 그냥 자신의 집에서 통학을 하기로 결심했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당차게 통학을 하고 싶었지만 우리 집은 기차와 시골버스로만 갈 수 있는 먼 타 지역이었기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학교와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살 곳을 알아보는 것은 비효율적이기에 어머니께 그냥 이번 학기는 고시원에서 지내겠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고민하는듯한 표정을 짓다가 어딘가로 갑자기 전화를 거셨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어머니는 전화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대뜸 나에게 "너 이모집에 가서 살래?"라고 물으셨다. 나는 '갑자기?'라는 생각에 황당하였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예상치도 못한 옥탑방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집에서 간단하게 짐을 싼 후 나는 이모님이 계신 곳으로 출발했다. 이모님 집은 어릴 적 한 두 번 갔던 적이 있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바둑판처럼 비탈길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모두 비슷비슷해 보였고 골목마저 복잡해서 핸드폰 지도만 가지고 찾아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나는 한참을 헤매다가 이모님께 전화를 드렸고,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정확하게 집 앞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이모님 집에 도착하자 이모님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부터 이모님의 집까지는 차로 약 30분 거리. 월세까지 낼 필요가 없으니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금자리였다. 처음에 이모님은 본인이 살고 계신 1층의 넓은 주택에서 함께 지내지 않겠느냐고 물어봐주셨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연락드린 것도 죄송했고, 신세를 진다는 것 자체도 무척이나 죄송한 일이었기에 권유를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러고는 옥상으로 가는 계단 한편에 마련된 작은 옥탑방을 가리키며 저기서 지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보통 옥탑방이라고 하면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옥상 정중앙에 지어진 집을 상상하기 쉬우나 이모님의 옥탑방은 구조가 조금 신기했다. 마당에서 10개 정도의 계단을 올라가면 옥탑방의 입구가 나오고, 거기서 계단을 네 개 더 오르면 옥상에 다다르는 약간 계단과 옥상 사이에 낀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옥상에서 보면 옥탑방이 약간 반지하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나는 어릴 적부터 이런 작은 공간에 홀로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옥탑방은 내가 오기 전에도 이미 사람이 산 적이 있었고, 이모님께서도 특별히 신경을 써주셔서 무척이나 깔끔했다. 가로로 4M, 세로는 약 170cm. 천장은 내 머리가 닿을 법한 약 180cm 정도의 작은 공간. 하얀 벽지와 황토색 장판이 깔린 이곳은 자칫 소형 컨테이너 안에 들어가 있다는 착각을 줄법했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바닥과 천장 사이에 고정하는 옷걸이를 설치한 후 책상으로 쓸만한 네모난 소반 하나를 놓자 싸늘하던 방은 어느새 생기를 띄었다. 여기에 가져온 옷가지와 이모님께서 주신 이불과 베개를 구석에 가지런히 놓자. 좁은 방은 마치 드라마 세트장이나 장난감 미니어처 같은 아기자기한 느낌까지 띄게 되었다.


 으레 좁은 방에 살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이 나기 마련인데 나는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즐거웠다. 특히나 문을 나서면 볼 수 있는 풍경들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내가 있는 옥탑방은 산의 중턱 정도에 있는데, 가끔 습기가 차는 새벽이 되면 능선을 타고 내려온 구름이 온 마을을 가득 덮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사이에 초코칩이 알알이 박힌듯한 모습과도 유사했는데, 아침에 기지개를 켜면서 이 모습을 내려다볼 때면 무언가 장엄한 경관을 본듯한 기분과 함께 상쾌함이 가슴을 스쳤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면 주변은 젊은 사람들의 대화로 왁자지껄 했다. 지대가 조금 더 높은 곳에 대학교가 위치해 있었는데, 자그마한 대학로가 집 뒤편에 형성되어 있어서 그런지 저녁만 되면 고요하던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 밤이 잦아들면 선명한 별을 볼 수 있었는데, 옥상에 앉아 어설프게 만든 작은 화로에 불을 붙이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작은 별빛들이 닿을 듯 낮게 떠있어서 설렘과 운치를 더해주었다.


 옥탑방에서는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감사해지는 것도 좋았지만 진정한 백미는 비가 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유독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을 더 좋아하는데, 소나기가 퍼붓는 날이면 음악을 틀고 한 시간 정도 창밖만을 내다볼 정도로 심취하게 되는 순간이 많다. 여하튼 옥탑방에 있을 때 비가 오면 사방에서 빗소리가 울리는데 이 쾌감은 다른 어디에서도 결코 느낄 수 없다. 옥상을 향해 나있는 창문에서는 바닥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 소리와 처마에서 흐르는 쪼르륵하는 물소리가 들리고, 낮은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북을 치듯 천장을 쉴 새 없이 울렸다. 이 느낌은 마치 텐트 안에서 빗소리를 듣는 것과 유사했는데 빗방울 하나하나에서 전해지는 생동감이 너무나도 커서 아직도 비가 오는 날이면 그날의 소리를 떠올리곤 한다. (오래전에 쓴 에세이 '비와 고양이'도 이 옥탑방에서의 추억중 하나다.)


 드라마에서는 가끔 주인공이 옥상에서 악기를 연주한다거나 친한 친구들과 평상에 앉아 파티를 하는 낭만적인 모습을 비춰주기도 하지만 실제 옥탑방에서는 그런 모습이 나오기가 어렵다. 방음이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옥상이 충분히 넓은 주택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장점들을 뿜어내는 것이 옥탑방이기 때문에, 나는 관심이 있다면 용기를 내어 옥탑방에서 살아보기를 추천한다. 내가 겪었던 그날의 기억처럼, 우연히 보낸 하루들이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각인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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