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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Feb 14. 2022

어느 날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면

 빗방울을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빗소리가 너무나도 그립다. 만약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기다렸던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면 무엇을 해볼까? 굳이 바깥으로 나가기가 싫은 날이라면 비와 어울리는 노래를 스피커로 튼 뒤 창문을 활짝 열면 좋겠지. 회색빛 하늘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음악에 심취해보는 것도 좋을 거야.


 만약 뛰는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면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도 좋겠지. 인적이 드물어진 오후의 거리를 홀로 걸으면서 빈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도 좋을 거야.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양쪽 귀에 끼고서는 이전에는 미처 가보지 못했던 공원과 산책로들을 저벅저벅 걸어보는 걸어보는 것이지.


 만약 길을 걷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렸다면 옥상이 있는 카페에 발을 들여보는 것도 좋을 거야.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과 조각 케이크 하나를 주문하고서는 적당히 가려진 2층 구석자리에 앉는 거지. 그러고는 책을 하나 꺼내어 테라스를 바라볼 거야. 화분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과 점점 선명해지는 초록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여유로움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거야.


 만약 비가 내리는 날이 퇴근을 할 무렵이라면 골목 뒤편으로 놓인 포장마차로 달려가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저녁을 물들이는 색색깔의 간판들을 지나 작고 투박한 빛이 새어 나오는 포장마차의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는 거지. 자주 갔던 터라 얼굴이 익숙해진 주인아주머니께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네요."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동과 어묵 한 그릇을 주문할 거야. 그러고는 차가운 소주 한 병을 잔에 따라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뒤 "크으" 소리를 내며, 밖에서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소나기와 건배를 나눌 거야.


 좋은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날에 비가 쏟아진다면 분위기가 좋은 일식 주점으로 가는 것도 좋을 거야. 몇 발짝 걸으면 주방이 훤히 보일듯한 소박한 점포 안에 나란히 앉아서 점장이 추천하는 메뉴와 튀김 꼬치, 그리고 따뜻한 사케 한 병을 주문하는 거지. 밖으로는 은은한 빗소리가 들리고, 테이블 가운데에 매달린 노란색 등이 창문을 아른거리게 만드는 공간에서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지. 그러면서 주고받는 투명한 술잔에 서로의 웃는 모습이 거울처럼 비친다면 참 행복할 거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 비가 내린다면 시장 골목에 놓인 파전집으로 가보는 것도 좋을 거야. 한쪽 다리가 닳아서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주문을 받을 때까지 여기저기 벗겨지고 낙서가 된 가게의 벽을 천천히 둘러보는 거지. 친구 녀석과는 "여기는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라며 너스레를 떨고서는 금색의 잔에 막걸리를 쉼 없이 따라 부을 거야. 금속이 맞부딪히는 잠깐의 소음이 들릴 때마다 잔은 비워질 테고, 널따랗게 부쳐져 나온 파전을 연신 입으로 집어넣어 가면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도 좋겠지.


 비옷을 입은 것처럼 습한 기운이 몸을 둘러싸는 것이 싫을 때는 집 앞 목욕탕을 간다거나, 바닷가에 놓인 정자에 앉아 비가 내리는 바다를 보며 멍하니 있어보는 것도 참 좋은 일이겠지. 와이퍼가 삐걱대는 차 안에서 빗소리를 즐기는 것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가보는 것도 참 좋은 일일 텐데 이제는 그러기가 힘들어졌네.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었던 이런 추억들이 이제는 마음 편하게 하지 못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참 씁쓸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아침이 오듯 그런 날은 반드시 오겠지. 그리워하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 온다면 참 좋겠어. 지긋지긋한 전염병은 가고, 굵은 빗방울들만 내게로 오는 그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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