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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의꿈 Jul 14. 2020

너만이 알고 있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저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외딴산 외딴곳에 들어가 혼자 살 겁니다.

나는 자연인이다 처럼 말이죠. 그런데 생각보다 그날이 빨리 왔습니다. 17년 다니던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거든요. 끝까지 버티다 결국 사직서를 썼지만 급체한 사람처럼 겨우 걸어 나왔습니다. 입사동기였던 남자 부장이 마지막으로 한말은 “이제 영영 못 보겠군”이었습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진급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진급 못했던 저를 몹시도 괴롭혔던 아나콘다 같은 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지긋지긋한 정글을 빠져나왔습니다.    

 

한낮에 태양이 아찔했습니다. 어디로 갈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 일단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영화는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별로 없는 영화관은 한산했습니다.

이 시간에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은 속내를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19금 영화 한 편을 골라 멍하니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사내가 다가왔습니다. 키가 크고 날씬하고 하얀 얼굴에 단정하게 생긴 남자는 바바리코트에 사무용 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사슴 같은 사내의 외모를 훑어보는 동안 사내는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커피 한잔 하시겠어요.   


뭐지... 이런 게 말로만 듣던 길거리 캐스팅인가?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사슴 같은 남자를 따라가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눈을 가진 남자의 외모는 저를 무장해제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작년에 왔던 그 남자- 카페 이름이 특이하다 생각했는데 내부도 독특하게 목조로 되어있었습니다.

향초를 피워 분위기를 내고 있었는데 구석구석 이름 모를 서적들이 잔뜩 꽂혀있었습니다. 벽에는 예술작품으로 보이는 조각상과 미술품들이 걸려있었고 선반에는 닦지 않은 먼지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부조화에 조화라고나 할까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품들이 내부를 그럴듯하게 꾸미고 있었습니다.


내용도 모르는 메뉴를 훑어보고 있는데 사슴은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기다려 주었습니다. 커피도 마시지 않고 차가운 음료도 마시지 않는 저로서는 고를 메뉴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런 카페에 와본 적도 없어 메뉴 고르기란 더더욱 힘들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저는 사슴과 같은 카푸치노를 주문했습니다. 에스프레소와 우유와 우유 거품의 비율이 딱 맞아야 제 맛이 난다는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는 사내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고 예뻤습니다. 그 흰 손가락이 너무 예뻐 넋 놓고 바라보는데 사슴눈을 한 사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구구절절 슬픈 이야기였지만 결론은 하룻밤을 같이 보내자는 거였습니다. 그러다 맘에 들면 다시 하룻밤.

그래야 자신이 사람으로 계속 살 수 있으며 5월의 개구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뭔 개똥 같은 소리였습니다.

낯선 사람과 아침을 같이 맞이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잠시, 이상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영화 시간을 놓친 채 사슴과  계속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가, 주위를 훑었다가 , 창밖을 보았다가, 하는 시선들로 서로를 느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꿈꾸듯 각자의 시간을 보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노을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붉은 노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슴의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가슴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비만 내리면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카푸치노 한잔을 삼켰습니다. 어둠 속에 천둥번개가 쳤습니다. 호흡은 가빠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카페인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네요. 웅성대는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아니 요란한 풀벌레 소리 같기도 하고, 나뭇잎을 비볐을 때 나는 풀향기 같기도 하고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 그대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달빛이 한 줌 보이는 눈을 떴을 때 시선은 낯선 곳이었습니다. 짙은 카푸치노 향에 다시 정신을 잃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습니다.  늘 달고 살던 불면증보다 더 큰 문제는 기억이 손상되는 거였습니다.      


손님 손님 잠은 집에 가셔 주무셔야죠.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뜨니 버스 안이었습니다.

어둠이 쫙 깔린 버스 종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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