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K를 처음 만난 곳은 학원 특강 장소였다. K는 그 당시 세 번째 영화를 준비 중이었고
학생들을 위해 특강을 하였는데 나는 학생도 아니면서 무작정 그곳을 찾아갔다. 독학으로 쓴 시나리오 한편을 들고 용감하게 그 먼 곳으로 향했다. 내가 쓴 시나리오가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푸른 꿈을 안고. 4시간 길을 떠났다.
오후 2시, 교실 안은 이미 학생들로 꽉 차 복도까지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내가 들어갈 틈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 틈을 비집고 겨우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k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K는 우리 쪽을 한번 훑더니 교단을 내려와 의자에 앉아있는 학생들 쪽을 향해 걸었다.
K는 K다운 발상을 했다.
‘ 강의를 꼭 교단에서 할 필요는 없죠. 제가 가운데로 갈게요. 이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겠지요’라고 했다.
그러자 앉아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의자와 탁자를 밀어냈다. 그제야 복도에 서있던 학생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학생들은 가운에 서있는 K를 중심으로 둥그런 원을 그렸다.
그리고 의자가 아닌 자유롭게 탁자 위 아무 곳에나 걸터앉았다. K가 그러라고 했다.
K는 영화를 전공한 충무로파도 유학파도 아니다. 그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녔고 그가 아무리 세계 유명영화제에서 수상을 해도 충무로에서는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를 외롭게 했을 것이다. 학벌이 없는 K는 자수성가한 감독이다. 40살 이전까지 영화를 본 적도 없을 만큼 불우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우연히 영화 한 편을 보고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프랑스에 간 것도 죽기 전에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마지막 선택지였다.
노숙인이라는 이유로 경찰들한테 죽도록 맞기만 했던 k가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생기자 달라진 대우에 그는 세상에 환멸을 느꼈다고 했다. K의 첫 영화 가 마니아층을 형성하면서 두 번째 영화가 우여곡절 끝에 탄생했다. 그렇게 매년 다작하며 필모를 쌓아가던 K. 그가 만든 영화가 이슈가 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제 영화가 지옥이라고요 현실은 더 지옥이다’
특강이 끝나고 k에게 시나리오를 건넸다. 사실 나는 K가 누군지 몰랐다. 그저 감독이라는 이유로 시나리오를 건넸다. K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가방 속에 잘 챙겨 넣었다.
그리곤 “ 뒤풀이 안 가세요? ”라고 물었다. “ 아, 네 가야죠” 했지만 나는 뒤풀이 참석을 하지 않았다. k는 자신이 받은 강의료로 뒤풀이를 했다. 참석하고 싶었지만 집이 시골이라 버스를 타야 했다.
나는 그 당시 은행 창구 출납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상무님이 나를 불렀는데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네 감독님!”이라고 말했다. 다들 벙 떠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K에게 보낸 시나리오 피드백만 상상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엄마가 처음으로 화를 내기도 했다. 밤낮 컴퓨터만 한다고.
연락이 없던 K에게 거의 스토커 수준이었던 거 같다. 시간이 흘러 K를 두 번째 만난 곳은 테크노마트 건물 사방이 유리로 만들어진 커피숖이었다. 그때는 이미 K가 유명해진 상태였다.
몇몇 국제 영화제를 수상했기에 조금만 관심 있으면 그의 행색을 누구라도 다 아는 시기였다.
나는 우습게도 “혹시 이러다 스캔들 나면 어떡하죠? ”라고 물었더니 씩 웃으면서
그러면 그러라죠 별 반응 없었다. 나는 내얼굴이 신문에 나오면 어쩌지 진지한 상상을 잠시했다.
그는 내게 점심을 먹었냐고 물었고 나는 먹지도 않았으면서 먹었다고 했다. 그러자 차 주문을 했다. 나는 녹차를 시켰다. 그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 대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곤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론 절대 글 못써요”라고 했다. 눈빛이 너무 맑아서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엔 글렀다고 했다. 사랑도 이별도 경험치가 중요한데 내게는 그런것들이 하나도 안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 꼭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영화판이 남자보단 여자가 감독과 작가가 되기 쉬운 공간이지만 당신까지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재능없음을 돌려서 하는거지만 한숨만 나왔다. 당신도 되고싶어 노력했음서.
k가 주로 말했고 나는 들었다. 녹차 물을 두 번이나 리필했을 때 우리는 그곳을 나와 근처 산책을 했다.
산책하면서 그는 영화얘기 출연한 배우얘기를 했다.
헤어질 때 K는 친절하게도 나를 터미널까지 배웅했다. 그리곤 근처에서 팔던 값비싼 ‘키노’ 영화 잡지를 사서 내게 선물했다. 시골서 갓 상경한 촌스러운 시골 소녀(?)가 꽤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의아한 건 K 가 굳이 나를 만나줄 이유는 전혀 없었던 거 같은데 외로웠던 것일까.
결혼을 했음에도, 수많은 여배우를 만났음에도 그는 외로워 보였다. 불우했던 과거가 찬란할 만큼 남들이 로망 하는 자리에 올랐음에도 그는 끝없이 배고픈 사람처럼 외로워 보였다.
K는 그 후로도 다작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뉴스를 통해 K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말처럼 현실은 지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외로운 한 마리 짐승이 돼버린 K.
새 삶을 꿈꾸던 K는 타국에서 생을 끝냈다. 그는 자신에게 그런 날이 오리란 걸 상상이나 했을까.
불우한 과거를 지나 신분상승된 삶을 살았지만 결핍된 애정 끝없이 외로왔던 k. 화려한 명품을 걸치고 오성급 호텔을 들어가는 창녀처럼 공허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