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는 컵라면을 먹으면서 연신 감탄을 하였다.
"후르릅! 크아~ 역시 우리나라 컵라면이 최고다. 아~ 좋다!"
십 년 전에도 컵라면은 싸구려 음식이라고 쳐다도 안 보던 녀석이 지금 상태가 안 좋기는 안 좋은가 보다. 나는 민망하지 않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 맛있네."
나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고야는 잠시 웃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
"이제 다시 혼자가 될 일은 없을 거 아니야."
갑자기 고야의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분명 내가 살고 있었던 집이며 내가 살던 동네고 내가 익히 알던 서울이었지만 이곳은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지난 34일 동안 아무도 없는 세상에 나 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 무섭게 다가와서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나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존재에 의해서 우리가 실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혹시 옛날 영화 중에 그.. 매트릭스 같은 거 아닐까?"
나의 말에 고야는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매트릭스? 그게 뭔데?"
'그런 명작을 안 보다니 무식한 녀석'이라는 나의 속마음을 얼굴에 나타낸 채 나는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너 안 봤구나? 그거 1999년에 개봉한 영화인데... 암튼 미래의 A.I. 가 지배하는 가상현실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사투를 그린 이야기야. 거기에서 가상현실 시스템이 지금 여기처럼 말도 안 되게 진짜 현실 같다고 나오거든? 아마도 이곳도 혹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서."
나의 말에 고야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풉. 야, 오늘이 정확히 2051년 6월 4일이야. 우리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나온 그 영화에서는 어떤 상상력으로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A.I. 개발에 뒤쳐진지도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어. 재작년인가 전 세계에서 다시 한번 A.I. 관련 선두를 달리겠다고 미국이 초월 인공지능이란 거 만들어서 가상현실 게임 지원한다고 뉴스 나왔었는데 얼마 전에 그 시제품 체험한 학생들이 그냥 좀 더 실감 나는 V.R. 수준이라고 아주 대놓고 혹평을 했더라고. 그런 현실에 가상현실은 무슨. 그리고 만약 가상현실이 맞다고 하더라도 십 년이나 뒤쳐진 우리나라가 이런 기술을 숨기고 있는 것도 웃기고 또 왜 하필 너와 내가 실험 대상으로 선택되었을까? 혹시... 너도 나처럼 형님들한테 쫓기고 있냐?"
잊을만하면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통에 기분이 깨지지만 이제 그러려니 하려고 했다.
"내가 너냐? 아무튼 여기가 가상현실이 아니라면 뭐 하는 곳일까? 그냥 지구에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과 서울 외에 모든 땅이 없어졌다는 것보다 우리가 이상한 곳으로 넘어온 것이 더 타당한 생각인 것 같은데... 아! 혹시? 이거 평행우주 뭐 그런 거 아닐까?"
평행우주이론은 이곳에 떨어진 지 일주일도 안되어서 생각한 여러 가지 가설 중에 하나였지만 무언가 창피해져서 지금 우연히 생각난 것처럼 말을 했다. 그런 나를 고야는 무슨 하등 한 생명체를 보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평행우주? 야! 이딴 평행우주가 어디 있어? 평행우주라면 서울 말고 다른 지역도 다 있어야지! 사람들도 있고! 이건 그냥... 아... 갑자기 머리 아프네. 기남아, 우리 조금만 이따가 생각하면 안 될까?"
고야는 정말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양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사실 나도 머리가 아팠다. 알 수 없는 어떤 인물에 의해서 꽁꽁 숨겨왔던 가상세계의 생체실험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된 것이라면 어째서 동의도 없이 이렇게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실제 내 몸은 어느 실험실에 감금되어 있는 것일까? 이 세계를 만든 사이코 박사가 사람이든 아니면 A.I. 든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는 아직도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는 고야에게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고야는 본인 집이 편하다고 했는데 노원구에서 강남까지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서 전화나 와이파이도 안 터지는 지금 연락할 방법이 없기에 한 집을 선택해 움직여야 했다. 잘못 헤어졌다가는 또 엇갈려서 며칠간 헤매다 만날지도 몰랐다. 결국 내가 양보했다. 우리 집은 좀 작기도 했고 무엇보다 녀석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체취를 빼앗을 것 같아 두려웠다. 고야네 집은 고등학교 때 살던 아파트가 아니었다. 거기는 몇 년 전에 세를 주고 본인은 아버지가 새로 사주신 신축 고급빌라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이 집은 아버지의 명의라 본인은 그냥 빌려 쓰는 거라고 했다. 아버지가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고, 부동산에 관련된 일은 자신의 주장이 먹히지 않는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 녀석도 나름 아픔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녀석을 측은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야네 집을 한번 둘러보고는 한 집에 화장실이 4개에 방이 6개나 있을 수 있음에 놀랐다. 방 크기도 가장 작은 방이 우리 집 안방만 한 것 같다. 화장실이 우리 집 작은 방보다 큰 것 같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보며 역시 재수 없는 놈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 여자에 빠져 그렇게 망가지다니 사람이란 존재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야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름대로 긴장이 풀렸는지 곧 잠에 들었고 나는 거품이 나오는 욕조를 이용해볼까 하다가 귀찮아져서 가볍게 샤워만 하고 손님방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기쁨도 잠시, 두 눈을 감았는데 아내와 애들이 또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우야, 우리야, 나라야... 오늘따라 정말 보고 싶다."
아내와 쌍둥이인 아들과 딸의 이름을 부르니 그렇게 많이 흘리고도 또 눈물이 남았는지 오늘도 베개를 눈물로 적시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이제는 시계용으로 들고 다니는 폰을 들여다보았다.
PM 11:05.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야의 집에 도착했을 때가 오전 12시도 안 됐었는데 거의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첫날에는 술집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붙이다 일어났던 거여서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한결 개운한 기분으로 방을 나섰다. 거실에 나오니 불도 켜지 않은 상태로 어두운 것이 고야는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거실과 부엌에 불을 켜고 갈증이 나서 물부터 찾았다. 집은 좋은데 흔해 빠진 정수기는 안 보여서 냉장고를 열었더니 비싸다는 생수가 한쪽 벽면에 가득 들어있었다. 이 물이 훔친 것이든 원래 있던 것이든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누가 장난을 치는지가 궁금할 뿐.
"야! 일어나. 저녁에 맛있는 요리 해준다며!"
나는 시원하게 500ml 생수를 한 호흡에 벌컥벌컥 들이켠 후 고야를 깨우러 안방으로 향했다.
"야, 지금 몇 신데..?"
분명 안방에서 옷도 안 벗고 뻗었었는데 고야는 방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잠을 잤던 흔적은 있어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냥 먼저 일어났던 고야가 혼자서 밖에 나가 장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TV도 나오지 않는 집에서 무엇을 하면서 기다릴까 하다가 갑자기 아침에 나랑 싸우다 발목을 삐어서 절뚝거리며 걷던 고야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리도 아픈 놈이."
뭐, 생각보다 별로 안 다쳤을지도 몰랐다. 내가 편한 대로 생각을 하고서는 그렇게 집안 곳곳을 다시 한번 둘러보다가 서재에서 꽂혀있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영어로 된 원서가 생각보다 많아서 고야가 실제로 머리가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 녀석 특유의 허세인지 헷갈렸다. 해독하기 힘든 책들은 뒤로하고 한편에 있던 만화책이나 집어 들었다. 역시나 심심할 때는 만화책만 한 것이 없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대형 화면으로 웹툰을 자동으로 스크롤해주며 음성서비스까지 지원되지만 역시 종이책을 넘기며 읽을 때가 제일 재밌다고 생각했다. 만화책도 거의 소장용인지 거의 새것처럼 깨끗해서 더욱 기분이 좋았다. 읽으며 혼자서 웃다가 뒤로 넘어가서 뒤통수를 책상다리에 찧었지만 오랜만에 실컷 웃고 나니 기분이 좋아져서 아파도 별로 아픈 것 같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고야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폰을 보니 오분 차이로 날짜가 바뀌었다. AM 12:05. 슬슬 초조해졌다. 무슨 문제라도 일어난 것 같아 걱정이 되어 외투를 걸치며 집을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강남은 고등학교만 다녔지 동네에 관심이 없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몰랐다. 집 밖을 나서면서 고야가 없다면 다시 들어올 수 없는 집인데 그냥 여기서 기다릴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주인도 없는 집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우스워 그냥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금방 근처에서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새벽 1시 30분이 되었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텐데 아무리 소리를 지르며 찾아보아도 내가 외치는 소리 끝에는 기분 나쁠 정도의 정적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마트는 조그만 구멍가게도 다 들어가 보았다. 혹시나 붕대를 가지러 갔나 싶어서 약국이 보이는 곳에도 뛰어다녀 보았다. 그렇게 뛰어다니다가 도저히 안돼서 집 앞에 세워진 페라리를 끌고 좀 더 소리를 내며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고야의 집으로 오면서 차키는 나에게 있어서 차를 몰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근처를 돌아다니며 찾아다녔는데도 불구하고 고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지만 고야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면 제발 지금이라도 나타나 주길 간절히 바랐다.
다시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혼자고 이곳이 어딘지,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그 해답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나에게 잠깐 나타났던 고야 녀석도 이제는 꿈이었는지 아니면 고야가 다시 원래 내가 알던 서울로 돌아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고야가 사라진 그 새벽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우연한 기회에 놀랄만한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TV가 나오지 않으니 너무 심심해서 중고가게에서 DVD연결 기기와 DVD를 찾아다녔던 적이 있었다. 다행히 허름한 골목 상가에서 내가 찾던 기기와 DVD작품들이 수없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나게 캐리어에 가득 담고 집에 돌아와 TV에 연결하기 위하여 설치를 한 후 화면을 켰을 때 갑자기 평소에 와이프가 좋아하던 주말 드라마가 나왔다.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귀신을 본 것처럼 혼자서 비명을 지른 것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TV가 정상적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생방송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혹시 몰라 바로 그 뉴스가 촬영되고 있는 방송국으로 고야가 남기고 간 무지개색 페라리를 끌고 갔었다. 역시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송국 내부에 불도 다 꺼져 있었으며 그 어디에도 방금 촬영을 한 것 같은 흔적조차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오기 전에 보던 프로그램들이 TV를 보지 않았던 기간만큼 회차가 지나가 있었다. 오늘 날짜가 2051년 7월 4일 화요일인데 정확히 오늘 시간과 맞아떨어지는 회차들이 제시각에 각각 방영되고 있었다. TV뿐만이 아니었다. 신호가 잡히지 않던 핸드폰도 데이터가 무제한으로 잘 돌아갔다. 인터넷과 유튜브도 검색하고 시청할 수 있었다. 다만 댓글을 달거나 나를 나타내기 위한 업로드는 에러 창으로 연결되어 버렸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괴이한 놀이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현실처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인터넷과 TV였기 때문이다. 이것조차 없었으면 정말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정보는 뉴스나 인터넷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알던 세상이 내가 사라진 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곳은 사이코의 놀이공원이 분명했다.
TV로 내가 알던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후부터 무너져갔던 정신을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술도 취할 정도로는 마시지 않았고 TV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다시 저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핏 좋은 점을 생각해보면 언제든 스테이크도 먹을 수 있고 비싸서 즐기지 못했던 고급 참치 요리도 마음껏 먹을 수 있기는 했다. 또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슈퍼마켓에 있는 육고기며 생선이며 할 것 없이 모든 제품들이 실제로 사람이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새롭게 채워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과정이 궁금해서 마트에서 하루 이틀 지켜본 적도 있지만 내가 있을 동안만 그대로였고 내가 문밖을 나갔다 다시 들어오면 어지럽혀져 있던 마트 내부가 가지런히 정리가 되었으며 소비기한이 지난 식품들도 다시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상태로 진열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실제 서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대로 연결되어 어떤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처음 한 달은 거의 라면이나 소비기한이 긴 식품들 위주로 식사를 하였는데 지금은 날마다 인터넷으로 요리법을 보거나 요리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집밥을 만들어 먹는 소소한 재미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은 닭볶음탕을 만들기로 하였다. 매콤 달콤한 맛을 생각하니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요리도 장비빨이다. 계량기구들만 잘 갖추면 누구나 전문가의 맛을 복제할 수 있다. 예전이라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아무 때나 먹을 수 없었겠지만 이 이상한 도시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맛있는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는 기쁨이 크다. 매콤한 양념이 촉촉하게 스며든 닭다리를 뜯으며 재미있는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니 잡스러운 생각이 잠시 사라졌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고 싶은 생각은 당연히 절대 없다. 그냥 맛있는 요리를 이제는 아내와 내 자식들에게 마음껏 해주고 싶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