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노트맨 02화

최고와 최악

by 영점오

내가 갑자기 도둑으로 몰자 고야는 당황한 듯 보였다.


"응? 아.. 니? 내 옷인데?"


"야... 멋쟁이 신사 고야가 지금 상표도 안 뜯은 옷을 입고 다녔던 것을 나보고 믿으라고?"


내가 증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고야는 갑자기 그 여유로운 미소 대신 처음 보는 씁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기남아... 너 술 다 깼으면 나랑 한잔 더 할래?"


갑자기 녀석은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였고 나는 속이 울렁거렸지만 녀석의 쓴웃음을 보니 그럭저럭 참을만해져서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술집에 도착하자마자 고야는 진지한 얼굴로 독한 양주부터 한 컵 가득히 따라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는 그런 녀석을 뒤로하고 속을 달래기 위하여 주방에 들어갔다. 이윽고 솜씨는 없지만 냉장고에 남아있던 어묵을 냄비에 담아 대충 소금과 간장으로 간을 하여 어묵탕을 만들어 가져 갔다.


"우웩! 야! 이것도 음식이냐?"


"이 상황에 불평은! 그럼, 너는 술이나 마셔라."


내가 먹어봐도 밍숭 맹맹 짭짤한 것이 별로긴 하였지만 어쨌든 나는 뜨끈한 국물이 필요했다. 나는 해장을 하면서 고야의 속사정을 들었다. 고야는 서울에서 부동산 부자의 외동아들로 자랐다. 고야의 부모님은 고야가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또 하고 싶은 것은 위법한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지원해주었다. 강남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자신의 명의로 된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따로 살면서 청소나 음식을 해주러 오는 사람을 고용해서 살 정도였다. 평생 승승장구할 것 같은 녀석이 삐뚤어진 것은 1년 전 마지막 여자 친구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그 여자는 남자 친구인 고야가 있어도 어딜 가나 다른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했다. 얼마나 멋진 남자들이 들이댔던지 항상 자신만만했던 고야도 점점 그녀가 자신을 계속 만나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스러웠다고 했다. 그래서 고야는 어떻게든 그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연애에 있어서 항상 갑이었는데 을이 되고 보니 정신을 못 차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야의 여자 친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했단다.


'자기야. 나는 자기의 자신감이 좋았고 자기의 여유로움이 좋았어. 하지만 그것이 부모의 능력에 기대어 뽐내는 허울뿐이었다는 사실이 요즘 들어 더욱 실감이 나는 듯해. 생각해봤는데 나는 본인의 능력으로 성공한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리고 사실 자기가 저번에 내가 가지고 싶다는 자동차 대신 명품 백을 사줬을 때 솔직히 별로 기쁘지 않았는데 기쁜 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나는 자기가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이든 나에게 가져다줄 수 있을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살고 있었나 봐. 자기가 작게 보이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내 마음이 멀어지네. 미안해, 이런 속물은 잊고 좋은 여자 만나. 그동안 고마웠어.'


이 무슨 막장 드라마인지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떡 하고 벌리고 말았다. 위의 어이없는 이별 통보를 듣고 고야는 난생처음 좌절이라는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로 며칠 술에 의지하다가 갑자기 자신이 돈을 많이 벌면 떠나간 그녀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서 계좌에 있던 돈을 모두 빼서 도박을 했다고 했다.


"미쳤구나!"


"그래, 미쳤지! 그것도 사랑에! 사실 그녀가 한 말이 사실이더라고... 막상 돈을 벌려니 정말 할 줄 아는 게 없었어. 무능력? 그것이 곧 나였지. 하지만 가진 거라곤 고작 현금 5억밖에 없는데 그것으로 운만 좋으면 큰돈을 벌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나는 항상 운이 좋았으니까."


"운은 개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래서? 뭐가 어떻게 돼. 그냥 하루 만에 날렸지."


"뭐? 하루 만에 그 큰돈을 날려? 하! 미친놈!"


하루 만에 5억을 날렸다니 기가 막혔다. 피 튀기는 어둠의 세계를 보지 못했던 순진한 왕자님이 보나 마나 꾼들의 작전에 휘말렸던 것이리라.


"거기서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멍청한 놈은 5억을 시작으로 눈이 뒤집혀서 부모님 모르게 여기저기 본인 명의의 부동산으로 대출받고 끌어다가 다 말아먹었다고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때부터 검은돈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한 달 전에 갚아야 할 원금만 100억이고 이자는 매일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께 말할 용기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이곳이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단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지 않는 것은 좋다고 했다.

"최고야. 너 어쩌다 이렇게 됐냐..."


"이 좌시기. 뇌가... 지금까지... 다 말했좌나! 사당! 사당 때문이라고! 으흐흑."


"뭘 잘했다고 다 큰 남자 새끼가 쳐 울고 앉았어! 됐다, 그냥 술이나 마시자."


"저얼대 안가! 나는 평생 여기 있으꺼야! 못가! 가면 마자 주글 지도 모른다고... 으허헝."


급하게 먹더니 술이 가득 취해서 혀까지 꼬부라진 모양이었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데 고야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이 상황이 갑자기 우습게 느껴졌다.



나의 이름은 이기남. 올해로 스물아홉이다. 내가 알던 세상을 잃어버린 지 35일째이며 최고를 만난 지 이틀째인 오늘, 전날 과음하였다고 고야는 벌써 숙취해소 음료를 몇 병이나 들이켜고 있었다. 그러더니 엉뚱한 말을 나에게 던졌다.


"야, 이기남! 너 어디까지 가봤냐?"


"어디까지 가봤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질문의 요지를 몰라서 되물었는데 녀석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 서울 밖으로 안 나가봤구나?"


생각해보니 지난 한 달 동안 꿈이라면 제발 깨라는 마음만 있었지. 이 텅 빈 서울 밖으로 나갈 생각은 못했었다. 그냥 서울이 이 모양이면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밖에는 하지 못했다.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보면서 잠시만 기다리라던 고야는 잠시 후에 굉음을 내는 무지개 빛깔의 자동차와 함께 나타났다. 가만, 저거 페라리 100주년 기념 한정판 에디션 아닌가? 전 세계에 딱 10대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나는 녀석이 저것도 훔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조수석 문이 자동으로 올라가고 그 사이로 보이는 고야는 나의 추궁하는 시선에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우연히 길가다가 주었다, 왜? 잔말 말고 그냥 타기나 해! 보여줄 데가 있으니까~"


나는 순순히 무지개색 페라리에 몸을 실었다. 완전 자율운행이 대세인 현재에도 페라리 한정판은 운전자의 손과 발에 의해서 움직이는 클래식함을 추구하였다. '운전하는 재미'라는 본연의 가치에 집중하는 모습이 역시는 역시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나의 차도 완전 자율운행이 없지만 페라리의 철학과는 많이 달랐다). 무지갯빛 페라리는 바람처럼 도심을 질주했다. 아무도 없는 도심의 신호등은 이상하게도 규칙적으로 빨간, 초록, 노란불로 바뀌는데 그 색깔이 어떻든 고야는 무시하고 시속 200km까지 속도를 올리며 달렸다.


"야! 조금만 천천히 달려!"


"흥. 겁도 많기는. 지금은 서울이 웬만한 서킷보다 안전하다고!"


그렇게 미친 듯이 달린 끝에 미아동에서 출발한 우리는 여의도, 목동을 지나 인천과 경계에 있는 김포 국제공항에 십 분도 채 안되어 도착했다. 그리고 조수석 창 밖을 통해서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 이거 뭐야? 여기가 원래 바다였냐?"


눈앞에는 거대한 파도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고 제주도 해안가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선사했다. 나의 놀란 반응에도 고야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처음에는 놀랐어. 어쩌면 내가 혼자라는 사실보다 다른 의미로 더 황당했지."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나는 고야가 제발 답을 알고 있기를 바랐다.


"인천 쪽만 그런 게 아니고 사방이 다 바다야. 산으로 막힌 부분 뒤에도 그렇고. 일단 주차하기 좋아서 이곳들을 보여준 거야. 결론을 말하자면 지금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두 개의 커다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곳은 우리가 알던 서울이 아니야."


"그걸 왜 지금 말해! 만나자마자 말했어야지. 이런 중대한 문제를 놓고 여자 친구 이야기나 하는 네 놈이 정상이냐?"


나는 사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한 나머지 죄 없는 고야에게 화를 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녀석은 펄쩍 뛰며 화를 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기남아. 진정해봐. 너 혹시 이곳에 온 지 며칠 됐냐?"


"오늘이 정확히 35일째."


"내가 생각하던 시나리오중에 하나가 맞았네. 야, 나는 정확히 31일 됐거든? 그 말은 너와 내가 시간차를 두고 이곳에 떨어졌다는 사실이지. 무언가 감이 오니? 스톤 헤드? 유남생(You know I'm saying)?"


"이 새끼가, 진짜!"


결국 성질이 더러운 내가 먼저 폭발하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는 만나자마자 심도 있게 나누었어야 할 일이 아닌가? 듣고 싶지도 않은 연애 실패담과 사채업자의 무서움에 대한 이야기를 새벽까지 들어주었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나는 여기서 쌓인 스트레스를 주먹에 가득 담아 녀석에게 날렸다. 마지막으로 주먹 다툼을 했던 때가 정확히 십 년 전 고3 때였는데 그때도 고야가 내 성적을 비꼰 결과였다.


'야! 너는 돈도 없는 놈이 머리도 안 좋으면 언제쯤 날 이. 기. 남? 푸하하하!'


'그래. 니 똥 굵다. 이 개 OO야! 퍽퍽!'


돈도 많은 녀석이 머리도 좋을 리는 없을 테고 어디 족집게 일타 강사를 모셔놓고 기출문제만 달달 외운 결과일 테지만 고야는 항상 나보다 성적이 앞섰다. 권투인지 태극권인지 모를 무슨 무술도 배우는 것 같았는데 깡다구만 내세운 나는 항상 고야를 일방적으로 팰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꼭 싸워도 고야의 오른쪽 눈이 퍼렇게 멍이 들면 나는 왼쪽 눈이 퍼렇게 멍이 들었고 내가 녀석의 코피라도 터뜨리면 녀석은 내 입술을 찢어 놓았다. 그렇게 만나면 으르렁대고 앙숙이었던 우리가 십 년 만에 개싸움을 하였다. 개싸움이라고 해봤자 서로 솜방망이 주먹질을 여기저기 주고받는 건데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둘 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이 이상한 도시에서 고야와 주먹다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 유치하게 느껴져서 그냥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만하자! 후..."


"야! 이기남! 그놈의 성질 머리는 여전하네. 그런데 나라고 이런 상황이 좋기만 하겠냐? 읍, 그래도 어떡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디에서든 살아남아야지... 욱.. 후.. 안 그래?"


녀석은 갑자기 몸을 격하게 움직여서 속이 안 좋은지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말하는 것 같았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고?"


또 한 번 허튼소리를 하면 이번엔 레슬링 기술을 넣으려고 마음을 먹고 물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획 세우기 전에 배고픈데 밥부터 먹자. 응?"


"그래. 이번에는 네가 요리해라! 나한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알았어. 기남이 네가 운전해. 나 좀 전에 넘어지면서 발목이 좀 삐었나 봐. 무식한 새끼. 아파 죽겠네."

진짜 아픈 것인지 고야는 절뚝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미안하다. 의사도 없는 곳에서 다치게 해서."


"맘에도 없는 소리는 됐고. 가자!"


나는 좀 전에 고야를 밀쳐 넘어뜨리면서 들었던 비명소리가 엄살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절뚝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미안해지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곳에 본인도 오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닐 텐데 나를 만나 괜히 봉변을 당한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다시 도심으로 향하면서 고야와 무엇을 먹을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마트에서 소고기를 가져다가 스테이크를 해 먹을지 아니면 파스타 면을 사다가 토마토나 크림 파스타를 해 먹을지 그것도 아니면 찌개용 밀키트로 간편하게 해장을 할지에 대하여 나름 심도 있는 회의를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고야와 함께 전자레인지에 돌린 즉석 밥과 스팸 조각, 그리고 컵라면 및 생수 한 병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야... 좀 심하지 않냐? 아까 그렇게 이것저것 말하더니 기껏 편의점이야?"


나의 비난에 고야는 미안해하였다.


"어제 너무 과음했나 봐. 도저히 뭘 만들 상태가 아니야. 일단 아점으로 대충 때우고 이따 저녁에 맛있는 요리 해줄게. 진짜 약속!"


"새끼손가락 부러뜨리기 전에 치워!"


갑자기 새끼손가락을 세우며 약속하자는데 가라앉던 숙취가 다시 올라와 짜증이 났다. 여기까지 차를 몰고 오면서 고야는 몇 번이나 속이 안 좋다 하였는데 그때마다 차를 세워주긴 하였다. 차에서 내려서 전봇대를 부여잡고 있는 것을 보며 그냥 버려두고 가버릴까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제 더 이상 혼자서는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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