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내면을 들여다보기 만드는 두 눈

by jairo

알브레히트 뒤러[Autorretrato. DURERO, ALBERTO. 자화상. 1498. P0]


헝가리 출신의 금 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나 1455년 뉘른베르크의 제국 도시로 이주를 하며 1467년 정착하여 결혼해서 수많은 작품활동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알프레히트 뒤러는 “기도하는 손”이라는 내용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원래 이 그림의 제목은 “사도들의 손”이라는 제목으로 그려진 것이다. 물론 친구의 손을 그림으로 그린 것은 맞다. 뒤러는 당시 자신에게 커다란 인상을 주고 독일 전체의 흐름을 이끌었던 화풍의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를 만나기 위해 콜마르(Colmar)를 찾아가지만, 숀가우어는 이미 1419년 2월 2일에 죽었기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혼하고서 3개월 뒤인 1494년 10월에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나 1495년에 귀국을 한다. 뒤러는 여행을 통해 다양한 모습의 성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인체해부학”을 접하고 나서 “인체비례학”에 근거한 그림을 그려 많은 이들에게 표본을 제시한 사람이다. 자신이 주로 다루었던 판화를 통해 “해부학적으로 완벽하다고 한 아담과 하와”를 찍어서 주변에 알리기도 했고, 뒤러의 그림이 일반인들에게까지 공급되는 놀라움의 비결은 “판화”를 통해 가능했다. 이런 판화 작품 중에 1498년에 간행한 목판 연작 [요한 묵시록]은 뒤러의 삶뿐 아니라, 유럽 목판화의 역사도 바꾸어 주는 획기적인 계기가 된다.


1505년 두 번째 베네치아 여행을 통해 티치아노, 조르조네, 팔마 이 베키오 등을 만나고 조반니 벨리니에게 강한 인상을 얻고 돌아옵니다. 이때 뒤러는 벨리니를 “회화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언급을 합니다. 이때 뒤러는 자신이 이미 뉘른베르크에서 배워왔던 정확한 소묘의 가치를 평가하는 법과 진실한 자연관을 배우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2번째 여행을 통해 예감하지 못했던 색채가 지닌 힘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 그린 그림이 바로 바르톨로메우스 교회를 위해서 그렸던 “묵주”였다. 베네치아에서 인정을 받았고 베네치아의 시의회에서 연금을 줄 테니 머물러 달라 제안했지만, 뒤러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후 뒤러는 다양한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해서 판화를 제작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회화 부분은 점점 드물어가는 현상을 보였다. 이때 뒤러는 자신의 동판화와 목판화를 복제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막시밀리안 황제로부터 얻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달 전에 뒤러는 목판화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이 그림은 서양미술사에서 죽을 정도로 병약해진 인간을 그린 최초의 초상화였다. 이후 카를로스 5세 역시 뒤러의 이전의 모든 특권을 다시금 확인해주며 인정을 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자화상은 모든 화가가 꿈꾸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자화상”이라는 그림을 최초로 그린 화가가 알브레히트 뒤러이다. 뒤러는 10세 때부터 스케치 등 다양한 그림으로 자신을 그려왔고 20세 때와 지금 26세 그리고 예수의 모습처럼 자신을 그린 28세의 자화상 등 모두가 자신의 뚜렷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먼저 중간 오른쪽에 쓰여 있는 글은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 나를 그렸다. 나는 스물여섯 살이다. 1498년.”이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뒤러 당시에 화가들은 오늘날의 화가로서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쟁이”를 뜻했던 과거 우리의 말처럼 “화공”으로 불렸었다. 사회적 신분도 낮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런 자신의 위치를 모든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리에 세워서일까? 당당한 눈빛을 보게 된다. 특히 저 눈빛은 훗날 세잔의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느껴지는 눈빛이다. 세잔도 뒤러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자화상의 대가라고 불리는 “렘브란트”는 오히려 선한 눈빛으로 “자아 성찰을 하기 위해 그렸다.”는 취지가 느껴지지만, 뒤러는 당당하다. 그리고 모든 이들을 내려보는 듯한 저 눈빛에 그 누구도 태클을 걸지 못한다. 그리고 “젠틸루오모(신사)”라고 하는 스타일의 당시 “패셔니스타”들이 입고 있는 옷과 장식들을 입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황금 자수를 넣은 셔츠와 갈색 층을 두는 파란색과 흰색 망토가 달린 비단 코트 등 장인에서 예술가로 인정을 받고 사회적 지위도 상승한 그러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과감하게 사용을 했다. 특히 당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대표하는 “회색 염소 장갑”으로 그의 손을 작업함으로 부와 명예를 얻은 자신의 위치를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뒤러를 보게 된다. 그리고 더욱 독특한 것은 오른팔이 창틀에 기대어 있는데, 이 구도는 흉상을 그릴 때 주로 L자 모양을 반복하며 사용하는데, 사실 그림의 뒤 창틀의 확장으로 구도적 안정감을 확인할 수 있는 기법이다. 뒤러는 이것을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었다.


뒤러는 독일이 유럽연합으로 하나가 되기 전까지 그의 작품들이 마르크화에 가장 많이 인쇄되어 활용되는 최고의 화가로서, 판화가로서, 독일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성장해 나간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에게 자손이 없으므로 인해 뒤러의 가문이 끝나버렸다는 우울함이 남는다.


하이로jairo의 출판을 하려다가 공개하는 개인 저작글이니 퍼가시거나 인용시 출처를 반드시 밝려 주시고 아래 댓글에 꼭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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