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기법으로 그려낸 1500년대 최고의 사회상 고발
히에로니무스 보스[Tríptico del Jardín de las delicias. EL BOSCO 또는 Jheronimus van Aken 또는 Jheronimus Bosch. 쾌락의 정원 세 폭 화. 1490~1500. P0]
“오늘 보실 작품은 히에로니무스 반 아켄의 작품으로…”하며 열심히 설명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왜 보스의 작품이 아니고 반 아켄의 작품입니까? 라고 묻는 상황이 연출된 적이 있었다. 그분이 줄기차게 들었던 이름은 “히에로니무스 보스”, “히에로니무스 보쉬”, “엘 보스코” 이런 이름이었는데, “히에로니무스 반 아켄” 생소하다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정정해주니 처음부터 화가 이름 제대로 말하고 해달라는 상황이었다. 가이드를 하다 보면, 참 재미난 일이 많다. 그리고 솔직히 이 한 그림만 가지고 1시간 설명을 해야 하는데, 여행을 많이 해봐서 알겠지만, 단체여행에서는 미술관에 할당된 시간이 1시간뿐이다. 그리고 프라도 미술관에서도 규정상 1시간 30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말은 화장실 다녀오고 입장하고 시간까지를 포함한 시간이다. 그런데 이 12일간의 여행은 이 프라도 미술관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왜 1시간 만에 나가느냐고 화를 낸 분도 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 상황들이 난감할 때가 많다. 어떤 분은 본인이 더 잘 안다고 홀로 다녀오겠다고 하는 분도 있는데, 열심히 1시간 설명하고 와 보니 벌써 와 있어서 언제 왔냐고 하니 볼 것도 없어서 그냥 바로 와서 쉬고 있다는 말에 아연실색할 때도 많다. 왜 이렇게 엉뚱한 서론으로 시간을 보내냐고 생각하겠지만, 엘 보스코 쾌락의 정원이 바로 그런 종류의 그림이다.
18세기 이전의 그림에는 항상 보면, 화가가 문제를 제기해 주고 난 후 그것에 대한 답을 제시해서 마무리를 깔끔하게 짓는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면 과거의 그림이 난 개인적으로 더 좋다. 물론 화가가 누구나 봐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을 느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세 폭 화”는 르네상스 당시에 플랑드르에서 주로 사용하던 기법으로 12폭 병풍처럼 그린 화폭도 있을 정도로 메인 그림 주변에 그 그림의 설명하는 이야기를 구성한 작품들이 많다. 마치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델라”가 양옆으로 온 느낌이랄까? 이렇게 한 이유는 평일에는 양 날개를 접어서 닫아두고 주일날 미사를 드릴 때만 열었다. 그러니까, 제단화로 그려진 그림이기에 십자가처럼 소중하게 다루어야 했던 그림들이라 나름의 방법을 간구한 것이다.
엘 보스코 쾌락의 정원은 왼편은 “천국”, 가운데는 “현실”, 그리고 오른편은 “지옥”이다. 이 그림을 닫으면 왼편 제일 상단부에 흰 원 안에 사람이 책을 들고 서 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상단부에 왼편과 오른편 날개에 나뉘어서 글자가 쓰여 있고, 중앙에는 지구의 천지창조 3일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상단부에 쓰여 있는 글귀는 시편 33편 9절의 내용으로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는 구절이다. 그런데 지구의 모습이 좀 이상하다. 당시에는 아직도 천동설이 그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물론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외친 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입증하고 케플러나 뉴턴 같은 학자들이 증명했지만, 교황청이 코페르니쿠스를 배척한 잘못을 공식 시인한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였다. 이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론을 정식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참 그림은 이렇게 시대적 상황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재미난 것이다.
열면 화려하고 복잡하고 산만한 그림이 펼쳐진다. 솔직히 제단화로 이 그림이 보인다면 뭐라 할까? 오해를 낳을 여지가 많다. 아무튼, 왼편은 천국 편부터 하나씩 풀어가 보려 한다.
천국 편은 4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제일 상단부의 산에 날고 있는 새, 중심부의 물가에 있는 분홍색 건물, 그리고 그 아래 3명의 인간, 그리고 제일 아래 하단부에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있다. 아까 분명 화가들은 문제 제기를 먼저 해 준다고 했다. 자 그럼 엘 보스코의 가르침을 따라가 보자.
제일 하단에 작은 웅덩이가 보일 것이다. 그 웅덩이 제일 오른쪽에 이상한 녀석이 보일 것이다. 규정을 위해 만든 보안 선을 넘지 말고 최대한 가까이 보이는 곳으로 이동해서 보자. 하반신은 물고기인데, 상반신은 팔도 나 있고, 머리는 오리같이 생겼다. 그런데 그 팔에 뭔가가 들려 있다. 그렇다. 바로 책이다. 책이 보이는가? 저 녀석이 이 큰 그림의 문제 제기다. 왜냐하면, 저 녀석이 읽고 있는 저 책이 바로 “원죄”이기 때문이다. 저 원죄를 읽고 있는 녀석은 바로 루시퍼 악의 상징이며 악의 우두머리인 사탄이다. 자신이 지은 죄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는데, 과연 반성은 할까? 아무튼, 저 녀석이 책을 읽으며 고민하는 내용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만든 인류를 타락시킬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맞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 위에 있는 그림이다.
붉은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고 앉아 있는 벌거벗은 남자는 아담이고 그 옆에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오는 여인은 하와다. 하와 뒤에 토끼를 그려놓은 이유는 다산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담의 뒤에 있는 나무는 독일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토록 만나보고 싶어 했던 자신의 이상적인 스승인 “마르틴 숀가우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무들 모양이다. 아무튼, 뒤에 수많은 나무는 전부 한 종류의 나무인데, 왜 홀로 마르틴 숀가우어의 작품인 저 나무 한 그루만 서 있을까? 사탄의 계략은 하나님이 선하게 만드신 이 세상과 자신을 닮은 창조물이라고 하는 인간을 타락시키겠다는 계략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표적이 설정된 것이다.
나무숲 위로 푸르른 강줄기가 흐른다. 그 안에 분홍색의 집이 등장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400년대에 저런 건물을 생각해 내다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을 앞서가는 사람은 많다. 엘 보스코의 머릿속이 궁금할 뿐이다. 저 분홍색 집 가운데 창문처럼 구멍이 나 있는데, 그 창문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유심히 보면 부엉이다. 부엉이는 2가지의 의미로 존재한다. 타락을 방탕을 상징하는 “밤”과 미네르바를 상징하는 “지혜”의 모습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루벤스의 작품 “파리스의 심판”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부엉이는 밤을 상징하고, 타락을 상징한다. 곧 사탄이 계획했는데, 그 계획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저 두 인간을 타락시키려고 한다는 것까지는 말을 했다.
그럼 방법은 무엇일까? 그 답은 제일 상단의 왼쪽 산에 있다. 산을 자세히 보면 오른편으로 새들이 나와서 산꼭대기로 돌더니 왼편의 무슨 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천국의 이야기가 끝난다.
이제 현실의 세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 어마어마한 부분을 설명하기 전에, 조금 전 천국에서 새들이 사라졌다. 그 새들이 이 지상으로 내려왔는데, 9시 방향의 물가에 모여 있는 새들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정중앙에 붉은색 V자 모양이 거꾸로 된 모습이 있다. 3시 방향에 부엉이도 있고 새들은 정확하게 중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 마디로 엘 보스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현실의 세계 중심에는 이미 악마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악마들이 도대체 왜 새로 표현된 것일까? 새들은 원래 우리 주변에서 아름다운 목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처럼 새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사람들이 쉽게 유혹되어 넘어간다는 의미이다. 우선 현실 세계의 물을 보면 상단부의 물은 깨끗하지만, 하단부로 내려갈수록 물이 어두워진다. 하나님이 만들어 준 세상은 맑은 물이었으나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어둡게 변해 버린 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상단부의 맑은 물 부분은 4개의 강줄기로 나누어진다. 이 강줄기는 인류의 4개 문명의 발생지를 의미한다. 생명을 상징하는 물이 스스로 타락함으로 인해 생명을 저버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붉은색 V자 모양을 뒤엎어 놓은 그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있는데, 재미난 것은 그 새가 지금 뭐를 하고 있는지를 보자. 그 밑에 수많은 사람이 새에게서 열매를 받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 모습은 9시 방향에도 같이 등장을 한다. 새의 등에 앉아 고민하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앉아 있는 새가 입에 열매를 물고 있는데 회색의 사람들이 그 밑에서 그 열매를 받아먹느라 정신이 없다. 아까 말한 것처럼 악마들의 달콤한 속삭임 속에 넘어가는 장면의 표현이다. 가끔 혹성탈출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 그림이다.
그리고 중앙에 큰 무리가 동물들을 타고 원형으로 돌고 있다. 이들이 도는 방향은 시계 반대 방향이다. 다시 말해 시간의 역주행으로 거스른다는 의미를 말한다. 이 동물을 타고 있는 자들의 특징들이 하나하나 이야기하자면, 당시 7가지 죄악으로 규정된 종교적 규율을 벗어난 탐욕, 음욕 등을 상징한다. 3시 방향에 보면, 3명의 사람이 파란색의 물고기 물어 뜯어먹고 있다. 그런데 그 물고기 위에서 토끼가 앉아 있다. 토끼는 다산을 상징하지만, 무병장수와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이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큰 물고기는 사람들에게 물어뜯어 먹히면서도 작은 붉은색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다. 탐식의 모습이다. 인간이나 자연이나 이미 타락을 해서 탐식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자연을 관리하도록 신에게 위탁받은 인간은 관리가 아닌 파괴로 인해 모든 상황을 망가뜨려 버린 것이다. 이 돌고 있는 무리 가운데 연못처럼 생긴 곳이 있다. 그 물가를 보면 검은색의 사람이 등장한다. 어느 날 어느 분이 “세계 최초로 아프리카 사람을 그린 그림입니다.”라고 하는 말이 안내하고 있는데 옆에서 들리는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림 속에 물론 다양한 색상의 인종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림 속에서 검은색은 사탄의 세력에 장악이 된 “원죄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원죄의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같이 물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 물가의 그림을 보다 보니 궁금한 것이 생겼다. 바로 사람들 머리에 열매가 있다는 것이다. 아까 원으로 돌던 무리에게도 이 열매는 종종 등장한다. 이 열매가 뭐길래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일까?
이 열매는 3시 방향의 숲에서 보인다. 어디서 많이 보던 열매 같아 보인다. 사람들이 숲에서 열매를 따고 있고, 그리고 부부같이 보이는 사람인지 큰 열매를 가져다주고 있다. 자 이제 추리해 보자. 화가들이 우리에게 뭘 말하려는 것인지? 열매들이 있는데, 그 주변을 보니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부엉이가 등장했다. 열매를 손에 들고 또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두 사람이 꽃같이 생긴 것으로 뒤집어쓴 채 춤을 추고 있는데, 그 머리 위에 앉아 있다. 대낮이다. 그런데도 부엉이가 등장했다. 바로 타락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럼 열매가 상징하는 것은 새들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도구라는 것인데, “체리”다. 체리는 “성적 욕망”을 상징한다. 딸기는 “여자”를 상징한다. 그래서 새들이 사람들에게 먹이를 주는 상황이 보인 것이다. 그럼 딸기 이야기로 마무리해보자.
11시 방향에 보면, 왼편에서 물줄기가 나오고 있는데 그곳에 있는 분홍색 건물 앞 잔디에 커다란 딸기 한 개가 있다. 그 밑에는 전부 남자다.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짐작을 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타락을 길을 거닐게 되었는데 어디까지 그 타락이 이어졌느냐 하면, 딸기와 남자들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4개의 물이 만나는 곳에 파란색의 집이 보인다. 이 집을 유심히 보면 아래 물이 잠긴 부분에 원으로 문이 나 있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왼편에 남자가 가운데 여인의 중요한 부위를 만지고 있다. 더 황당한 것은 그 여인의 뒤편에 한 남자가 붙어 있는 그림이다. 이처럼 다양한 묘사들이 거의 19금 수준이다. 이런 타락의 절정은 9시 방향 새들 무리로 돌아가면 있다. 그곳에 가면 작은 크리스털이 보일 것이다. 그 크리스털을 남성의 생식기라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의미는 플랑드르의 속담이다. “불륜의 하룻밤은 깨어지는 유리와 같다.” 크리스털 속 모습은 10대로 보이는 소년과 2, 30대 중년 부인의 모습이다. 크리스털은 금이 가 있다. 온전한 사랑이 아닌 불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속담의 의미를 담자면 사랑이 아닌 단순히 즐기기 위한 성적 욕망을 채워가는 모습을 비판한 것이다. 그 밑에 보면, 한 사람이 원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고 그곳에는 투명 관이 연결되어 있다. 이 유리관 끝에는 검은 생쥐가 한 마리 있다. 14세기 유럽에서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은 흑사병의 의미일까? 물론 맞을 수도 있다. 순식간에 퍼진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원래 쥐는 그림에서 “선한 사람을 꼬여 타락하게 만드는 속임수”를 상징한다. 결국, 맞은편 얼굴만 등장하는 이에게 쥐는 타락으로 빠져들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 타락에 빠진 자들은 흑사병으로 30~60%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는데, 엄청난 파급력으로 인간은 죽게 될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럼 이런 세상을 막아줄 종교가 있지 않았냐? 는 반문이 나올 만하다. 그러나 “대항해시대”의 눈을 뜬 유럽은 모든 것이 가장 풍성한 시기가 되는 때가 또 이때다. 종교도 동반 풍요의 시기가 된다. 바로 현실의 장면 맨 오른쪽 아래 끝을 보면, 서 있는 5명의 무리가 보일 것이다. 맨 앞에 검은색의 사람 그리고 그 옆에 흰색의 사람이 등을 돌린 채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얼굴만 흰색이고 몸에는 레깅스 스타일의 옷을 입힌 것처럼 목 부분부터 발목까지 옅은 회갈색으로 그려놓았다. 이들은 “사제(신부)”를 의미하다. 결국, 모든 이들을 선한 길로 이끌어야 할 사제들까지 탐욕에 물들어 원죄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 그렇다. 바로 지옥이다.
오른쪽 패널은 바로 이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불에 타는 듯한 모습의 건물들이다. 번쩍이는 불빛은 그것을 더욱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검은색의 지옥 불빛 중 오른편을 유심히 찾아봐 주기를 바란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빛이 길게 앞으로 뻗어 나오고 있고 그 오른편에는 3그루의 나무가 보이고 그 빛과 나무 밑으로 붉은색의 용광로 같은 것이 보일 것이다. 이제 찾았다면 그 뻗어 나오는 빛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지옥문이다. 작아서 안 보이지만, 내려받아서 확대해보면 사람들이 한 줄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이다. 신이 만들어 준 세상을 현실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욕망으로 인해 타락시킨 인간들이 들어갈 곳은 이곳이라는 소리다. 그 지옥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을 겪게 될까? 하나씩 우리에게 그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귀가 있는데, 그 사이에 칼이 있다. 성경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저 귀는 어떤가? 막혀 있다. 들어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의 고집스러움으로 결국 귀가 막혀 판단력이 없어졌다는 의미다. 그 벌로 그 귀를 자고 있는데, 문제는 칼의 날이 제대로 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날이 제대로 서지 않은 칼은 날카롭지가 않다. 날카롭지 않은 칼은 결코 쉽게 자를 수 없다. 그렇다면 잘리는 귀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 칼 오른편에 원반 위에 보라색 물체가 등장한다.
마치 사람의 위 모양으로 생겼다. 위는 사람이 평생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을 저장한 창고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분홍색 끝부분이 피리 모양으로 생겼다. 그 앞에 흰 천으로 둘러싸인 사람은 러시아의 마트료시카처럼 생겼다. 저 상황이 설명하는 것은 이해가 쉽다. 저 사람이 무엇을 들었는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앞에 악마의 손에 끌려가는 게 힘없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안다. 자신이 지었던 세상 삶 속에서의 죄를 저 피리가 다 이야기하자 더 변명의 여지도 없고 희망도 없자 모든 걸 포기하고 끌려가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 밑에는 얼굴과 깨어진 엉덩이가 보인다. 깨어진 엉덩이 부분 옆에 있는 긴 나무에 열쇠가 있고 그 열쇠에 매달려 죽은 사람과 그 밑에 머리, 뼈 등의 모습은 마치 살바도르 달리에게서 자주 등장하는 그림 스타일 같아 보인다.
다시 오른편의 얼굴로 가보자. 저 사람은 누구일까? 뒤러의 자화상에서 “화가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5가지 주 된 특징을 사용한다.”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그 4가지는 첫째, 사인이다. 둘째, 전면 응시의 얼굴이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도 나를 안 보고 있는데, 수많은 군중 속에서 목표물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마치 톨레도 산토 토메 성당에 있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에 보면 다들 하늘을 쳐다보는데, 어린 꼬마와 왼편에서 6번째 손들고 있는 남자다. 이 사람은 엘 그레코 자신이고, 아이는 자기 아들이다. 나중에 1층의 엘 그레코 방에 가면 “오순절” 그림을 보면서 다시 설명하겠다. 셋째, 배경이다. 이 말은 틴토레토의 세족식에서 설명하겠다. 넷째, 종이다. 이 부분 역시 엘 그레코 방에서 설명하겠다. 아무튼,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 그림의 주인공 엘 보스코이다. 지옥에서 그 중심부를 차지하며 여러 가지 시사하는 그림에 둘러싸여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엉덩이 부분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깨어진 그 부분 안에 왼편에는 술 창고가 있고, 오른편에는 탁자 같은 것이 있어서 심판대가 아니냐? 는 추측을 낳고 있다. 이런 다양한 해석이 일어나는 건 엘 보스코의 천재적인 표현법 속에 아직 우리가 온전히 그 뜻이 무엇인지를 분석해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리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스케이트 타는 악마도 있고, 나름 무거워지려는 그림 속에 익살스러움을 삽입하는 화가들의 유희도 즐겨보면 행복하다. 이제 마지막 하단분인데, 하단부는 크게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프에 매달린 사람, 메트로놈 같은 악상 기계에 눌려 죽은 사람, 오른편에 의자에 앉아서 냄비를 뒤집어쓴 새가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 그 의자 밑에 누워 기절한 여자, 왼편 아래에는 도박꾼들의 최후를 드러내는 듯한 모습, 마지막으로 오른편 아래에 수녀 가운을 쓰고 있는 돼지와 한 인간 사이의 묘한 이야기 등으로 마무리가 된다.
우선 하프에 매달린 사람은 평생 쾌락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사람에 대한 징벌이다. “뭐? 저 정도야!” 하겠지만, 저 하프 줄 하나하나가 우리의 신경에 연결되어 있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아마 참담함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있으면 절대 안 되는 일인데, 치과에서 간호사 선생님께서 신경치료를 마치신 줄 알고 의사 선생님께서 드릴을 이에 대고 치료를 시작했다면 바로 저 그림의 상황이다. 세상의 쾌락을 흐름을 이제는 고통으로 느끼게 하는 저 하프를 볼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엉덩이에 악보가 그려져 있는데, 저 악보는 실제 장송곡으로 연주가 가능한 곡이라고 한다. 유튜브에도 저 음악을 악보대로 연주한 것이 많이 올라와 있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이동을 하면, 냄비를 쓴 새가 등장하는데, 이 새는 없는 새이다. 환상 속의 새이다. 이 새의 이름은 “툰달”이다. 아일랜드 수도사가 쓴 “기사 툰달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툰달이 지옥을 다녀왔는데, 지옥에서 한 새가 사람을 잡아먹고 있기에 “저 새가 무엇이냐?”고 묻자, 옆에 있던 지옥인 이 “탐식의 사람을 잡아먹는 새다.”라고 했다. 그 말을 툰달은 수도사에게 했고, 이후 지옥에 다녀온 툰달의 이야기에 근거해 지옥의 새는 “툰달”이 되어 버려다. 그럼 저렇게 사람을 잡아먹는 벌을 내리는데, 자세히 보면 너무 단순하다. 왜냐하면, 잡아먹고 바로 사람을 그 엉덩이 부분의 유리로 보여주는데, 바로 원래대로 살아난다. 이런 벌이라면 “뭐 괜찮겠네.” 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세히 보면 그 유리에서 아래 작은 웅덩이 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 속에서 뭐 하냐? 바로 양옆에서 토하고 싸는 것을 그대로 먹으며 사는 형벌을 받는 것이다. 참으로 죄와 벌의 관계는 묘하다.
그리고 그 툰달 발밑에서 한 여자가 쓰러졌는데, 그 여자의 가슴에는 두꺼비 한 마리가 있는데, 두꺼비는 그림 속에서 허영을 상징한다. 7가지 죄악 중에 등장하는 허영의 죄로 죽은 여인의 최후의 모습으로 악마에게 조롱을 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왼편으로 오면 토끼가 사람을 매고 가고 있다. 어떤 분이 “토끼 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런다.”라고 설명하는 걸 듣고, 정말 한참을 그분을 바라봤다. 저 그림은 노름꾼들의 최후의 광경이다. 카드놀이와 다트판을 대신한 악마들의 놀이에 이용당하고 있다. 그래서 저 그림에 그 의미를 알려주는 주사위와 카드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의 마지막 답이 남았다. 처음에 시작할 때 분명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분명 답도 준비했다고 했다.
바로 오른편 돼지이다. 그런데 저 돼지를 보면 이상하다. 수녀의 가운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저 돼지는 수녀였을까? 아니다. 저 돼지는 진짜 돼지가 맞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남자 아까 다른 사람들과 다른 피부색이다. 약간 회색빛이 도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 바로 사제이다. 사제의 무릎에 있는 것은 결혼 서약서이다. 이 시기는 이세벨 여왕 이후 콜럼버스의 바스쿠 다가마로 인해 “대항해시대”가 열렸던 시기이다. 유럽은 일명, 황금기를 맞이하기 시작한 때 결국 그 황금기로 인해 “종교와 양심의 타락”을 맞이하게 되고 엘 보스코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 종교적인 모든 타락상을 고발한 그림이었다. 아무도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행인 것은 펠리페 2세가 주변의 도움으로 엘 보스코의 그림들을 스페인으로 잘 가지고 와 줌으로 오늘 전 세계의 적은 작품들이 존재하는 엘 보스코의 그림 중 10편을 이곳 프라도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 그림은 “인간의 양면성”을 고발한 그림으로 당시에 그림의 주제도 그랬지만, 파격적인 그림의 형태를 지녀서 그 시기에는 누구도 이 그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현대에 와서 바르셀로나의 미로가 이 그림을 접한 후 충격에 싸여 있었고, 이후 이 그림을 모티브로 “경작지”를 완성하게 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의 이상적인 출발점을 제시한 그림으로 무려 500년을 앞서서 그린 최고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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