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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iro Feb 14. 2022

레오니 부자가 만든 카를로스 5세의 모습

그 내면을 그려낸 최고의 조각

 레오니 부자(리온 레오니, 폼페오 레오니)[Carlos V y el Furor. LEONI, LEONE. 카를로스 5세와 분노. 1551~1555. P1]

 

    카를로스 5세는 스페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과거 1492년 1월 2일 이세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아라곤과 나바라 그리고 카스티야와 레온 지역을 통합해서 하나의 에스파냐(España. “한적하고 외진 곳”이라는 원어적 의미를 지님)를 세웠고, 이세벨 여왕의 유언으로 에스파냐는 단일 국가체제로 넘어간다. 이세별 여왕과 페르난도 왕 이전의 스페인은 과거 페니키아, 카르타고, 그리스 등의 영향력을 기원전에 받았고, 세비야 지역의 전설로 전해져 오다가 최근 그 유적이 발굴됨으로 인해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타르테소스(장수의 마을이며, 왕정 체제를 갖추었으며, 모든 물자가 풍부한 도시로 세비야 지역으로 추정. 플라톤의 글에도 나왔고, 많은 이들이 사라진 아틀란티스가 아닐까? 연구하는 곳이기도 하다.)” 외에는 특별하게 이베르족이 주변에 영향력을 끼친 적이 없다. 선하고 대항하기를 꺼리지만, 결코 자신의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강한 마음을 지녔던 민족이 바로 이베르족이였다. 이렇게 많은 세월을 흘러 스페인이 왕정 체제를 갖추었는데, 당시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조가 서로 왕권 쟁탈의 장소였다. 하지만 이세벨 여왕이 죽고 그 딸 후아나(그라나다에 묻힌 광녀 후아나. 뒤에 그림으로 설명하겠다.)의 남편 펠리페 1세가 그만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만다. 그래서 왕위 계승 서열이 혼란을 겪게 되었을 때 후아나의 아들인 카를로스 5세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모든 유산을 이어받는 최초의 강력한 군주가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카를로스 5세는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로 호칭한다. 하지만, 왕의 서열상 황제가 왕보다 높으니 당연히 카를로스 5세라 호칭을 하는 것이다.


    카를로스 5세는 평생 전쟁을 쫓아다닌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카를로스 5세의 나라를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훗날 아들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빼앗기고 만다. 자신이 한 나라, 한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정복한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안가에서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카를로스 5세는 고질병인 통풍으로 인해 죽고 만다.


    카를로스 5세가 스페인의 예술에 끼친 영향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모든 북유럽의 문화유산을 가지고 내려올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고, 르네상스 전성기를 움직였던 베네치아의 “티치아노”의 그림을 스페인으로 가져올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카를로스 5세의 전쟁에 대한 가장 참혹함을 드러냈던 “뮐베르크 전투(1547년 4월 남부 독일에서 개신교와 맞서 승리를 하게 됨. 1517년 종교개혁의 서막을 알렸던 상황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로스 5세는 1521년 보름스 회의에 소환하면서 루터의 안전을 지켜주기까지 했지만, 결국 나중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쟁으로 끝이 난다)”의 여파로 북유럽이 서서히 등을 올리는 계기가 된다.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존을 제안하며 잠시 휴전의 모습인 듯했으나, 개신교는 프랑스의 앙리 2세와 결탁하여 카를로스 5세에게 대항을 하였고, 결국 카를로스 5세는 네덜란드로 돌아가 지내다가 1557년 스페인의 유스테 수도원으로 옮겨와 은둔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1558년에 죽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 레오니 부자가 만든 이 청동상을 보고 있노라면 작품이 이해가 된다. 카를로스 5세는 항상 그림 속에서 창을 들고 있는데, 보통 왕은 우리나라 왕과 신하들이 들고 있던 것처럼, “척”을 들고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늘 창을 들고 서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은 “로마 황제의 계보”를 이은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에게 맞게 레오니 부자는 카를로스 5세의 동상을 누드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이유는 당시 로마의 누드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전부 신이었다. 로마 황제는 결국 신으로 여겨졌고, 카를로스 5세 자신도 그러한 야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것을 이해한 레오니 부자가 누드로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동상이다.


    이 동상은 1551년도에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시작을 해서, 1553년 주변의 배경인 의인화된 인물 “분노”를 만들었다. 이 분노는 어찌 보면 카를로스 5세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못 이른 꿈에 대한 울부짖은 것처럼 들리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일까? 카를로스 5세와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의 신앙으로 모든 것을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주변의 원성을 사게 되었고, 등을 돌리는 일이 잦아졌다. 이후 이것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1555년 이 동상에 입히는 갑옷을 만들었다. 실제 이 누드 동상에 청동 갑옷을 가져다 입히면 하나의 작품이 된다. 처음부터 갑옷을 입은 동상이 되었던 그것처럼 말이다.




그림없는 미술관(YouTube)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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