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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iro del MUSEO DEL PRADO Feb 17. 2022

티치아노의 카를로스5세의 기마상

뮐베르크 전투의 양면

 티치아노[Carlos V en la Batalla de Mühlberg. TIZIANO, VECELLIO DI GREGORIO. 뮐베르크 전투의 카를로스 5. 1548. P1]

 

    인생무상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다. 자신의 화려함을 드러내고 싶었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의도한 대로 흐르지 않았고 자신이 홀로 생을 마감할 때 유일하게 가져갔던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 한 마디로 이 그림은 자기 죽음을 함께 지켜본 그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카를로스 5세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왕으로 스페인도 계승권을 이어받아서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을 1555년부터 자기 이름으로 물려받은 다스린 첫 번째 군주였고 스페인 최초의 국왕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에서 카를로스 1세의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을 한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왕이요, 제국은 황제의 이름으로 사용됨에 따라 자신 스스로 카를로스 5세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펠리페 1세와 이세벨 여왕의 딸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기대한 제국을 소유했음에도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겪게 된다.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를 낳고 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개신교와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자신의 꿈인 가톨릭의 국가를 세우고자 했지만, 북유럽의 자유무역으로 인한 사회 기반에서는 이것이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물론 초기에는 루터를 지켜주고 보름스 국회에도 나오도록 했지만, 결과적으로 개신교를 물리치는 정책을 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자신이 다른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독일에서 증가하는 문제들을 동생 페르난도에게 넘겨버린다. 하지만 전쟁은 지속해서 계속되었다.


    1546년 뮐베르크에서 남부 독일 개신교 연맹 군을 물리치게 된다. 가장 잔인했고 혹독한 전쟁이었다는 이미지가 강한 이 상황을 카를로스 5세는 다른 각도로 알리고 싶었다. 선하고 믿음직한 황제로 자신을 그려주기를 원했고, 티치아노는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그렸다. 특히 “벨라투라 기법”으로 “실크 기법”이라고 부르는데, 밝은 부분과 그림자 내의 회색/중간색을 띠는 부분을 나타내기 위해 얇게 겹겹이 덧칠을 하면서 해당 부위를 돋보이도록 반복 작업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 기법으로 갑옷이 도드라지게 보이게 했고, 석양과 카를로스 5세가 다른 이미지 공간에서 서 있으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이 아닌 같은 색채감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티치아노를 “색채의 마술사”라고 했나보다. 특히 이 그림 속에서 카를로스 5세는 자신의 로마 황제의 계승권을 이어가는 자로 등장시키기 위해 긴 창을 사용했다. 앞에서 레오니 부자의 조각상에서 이 부분은 설명했다.


    폭군 적인 이미지보다는 부드럽고 신뢰감을 줄 만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 주기를 원했고 그 마음을 읽고 그려준 티치아노의 이 탁월함에 깊은 존경과 함께 “황금 박차 기사” 계급을 하사해서 4대가 백작의 가문이 되었고 또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 보겠지만, 목걸이가 보인다. 그 목걸이는 이 그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 카를로스 5세의 선물이었다. 마드리드의 왕궁에 가면 저 말의 안장 등 카를로스 5세의 그림 속 등장하던 많은 유물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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