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iro del MUSEO DEL PRADO Feb 17. 2022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아담과 하와 비교하기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

 티치아노와 루벤스[Adán y Eva. TIZIANO, VECELLIO DI GREGORIO Y RUBENS, PEDRO PABLO (COPIA DE TIZIANO, VECELLIO DI GREGORIO). 아담과 이브. 1550 Y 1628~1629. P1]

     

    티치아노는 1550년경 왼편의 "아담과 이브"를 그렸고, 그것을 모작으로 바로크 시대의 색상을 풍기며 화려함으로 그려낸 루벤스의 작품 "아담과 이브"가 같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한 유명한 시인 분과 잠시 대화를 했을 때 그분도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자신이 쓰고자 하는 방향의 시와 관련된 작품을 무려 10,000편을 읽었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도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기 위해 기본적으로 매년 2,000편은 읽는다고 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이 때문인가 보다.


    아무튼, 티치아노의 작품은 1550년경에 그려진 그림으로 우리가 보아도 실로 단순하다. 중간쯤 물러나서 두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너무나 차이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많은 분이 색감을 이야기할 것이고, 그리고 인체의 두드러진 곡선미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두 그림에서 틀린 그림 찾기 게임을 진행하면 재미난 광경이 펼쳐진다.


    티치아노에게서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뱀과 이브의 발밑에 있는 여우가 보인다. 루벤스의 그림에서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뱀과 이브의 발밑에 여우 그리고 한 가지 추가된 것이 아담의 머리 위에 있는 앵무새이다. 그리고 아담의 중요한 부위를 가리고 있던 나뭇잎을 제거하였다는 것이다.

    

    티치아노의 작품에서는 아담이 뱀과의 시선이 일치하고 있으며, 이브에게 손을 내밀고 있으면서도 방관자적인 느낌으로 뒤로 물러선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당시까지만 해도 신의 약속에 대한 엄격함이 존재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자신은 그 현장에 관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방관자적인 입장도 아니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안일한 태도가 느껴졌다. 루벤스의 작품에서는 티치아노가 아담과 뱀이 일치하던 시선과는 달리 아담과 뱀 모두 이브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또 아담의 몸도 이브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관심과 태도에 대한 우려"가 묻어난다고 해야 할까?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우선되어짐을 느꼈다. 뱀 역시 자신의 꾐에 인간의 판단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심 있게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티치아노에게서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던 아담의 반응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뱀의 말을 듣자마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맛나 보이는 선악과 열매"에 대한 이브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루벤스는 이 작품을 통해 아마도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선택의 도구"가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그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왜 굳이 뱀 말고 두 작가가 여우를 공통으로 넣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성경에 보면 여우는 간교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결국, 여인의 발밑에 그림을 그린 것은 "원죄"에 대한 기본 뿌리를 알리기 위함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서 있는 발 바로 옆이라는 이미지는 바로 우리 인간이 밟는 그 모든 현장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라는 것이다. 그런데 티치아노에는 없는 앵무새를 그려 넣은 루벤스의 의도는 무엇일까? "앵무새"는 "따라쟁이"의 의미가 강하다. 그 시선은 뱀에게 향하고 있는데, 아담의 이중성을 증명하는 듯 느껴졌다. 다시 말해 이브의 선택을 결국 따라 하게 된다는 의미를 루벤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성경대로라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라는 의미를 "즉시"라는 개념으로 해석을 했을 텐데, 이브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아담의 태도는 정말 파렴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오직 자신과 이브뿐인데…. 분명 죽는다는데…. 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르기나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이 두 작품을 곰곰이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루벤스는 분명 티치아노를 모작했지만, 같이 그리지는 않았다. 항상 다른 시선과 다른 감각으로 자신의 의도를 나타냈다. 티치아노는 당시 시대상을 품고 있듯이 아직은 신의 "전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에 대한 갈등과 고민 그리고 방관자적인 입장을 묘사한 것 같다. 루벤스는 신에게서 점점 멀어져 인본주의 흐름으로 흘러가는 생활의 모든 것을 내포하며 의미하는 듯했다. 그래서 모든 시선 처리가 심지어 뱀으로 표현되는 사탄마저도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며 지내고 있는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함에 섬뜩함이 밀려왔다. 마치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는다."라는 말처럼 기회를 노리고 있는 섬뜩한 눈빛을 루벤스는 보이려 한 듯하다.


    이 두 그림을 보면서 드는 느낌이 한 가지가 있다. 사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루벤스의 그림이 좀 더 화려하고 밝고 우리 눈에 익숙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왜, 루벤스의 그림보다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군주들의 화가라는 이름 외에 색채의 마술사라는 이름을 부여했을까? 자세히 보면 어둡고 탁한 느낌 외에는 없는데 말이다.


    원래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을 그리고 난 후 바니시를 발라서 그림의 변형을 막는다. 하지만 이 바니시의 성질이 세월이 흐르면 검은 갈색이 되고 또 먼지를 빨아들이게 된다. 복원가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이 바니시를 제거하고 원색을 복원하려고 애를 쓰게 되는데, 이 티치아노의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에서 수차례 복원을 시도해 보려 했지만, 잠정 중단을 했다. 과거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물에 잠겼을 때 침수된 작품들을 복원가들은 그냥 두기로 했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시대의 복원가들이 복원해야 이 상한 상태에서 더는 망가지지 않고 원작자의 의미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티치아노의 작품에 손을 댔지만, 결국 벨라투라 기법에 따른 그림들로 겉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속의 그림물감까지 같이 사라지는 안타까움에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티치아노가 작품을 그릴 때 어두운 부분을 상용하기도 했지만, 얇게 덧칠하며 그렸던 방식이라 더 쉽게 반응을 했다.


    그래서 언뜻 보면, 루벤스의 화려함이 보이지만 사실 티치아노의 이브 엉덩이 부분의 산을 보면 라피스 라줄리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던 티치아노의 화풍을 따라갈 수 없었다. 베네치아는 당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무역으로 성장한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자신들이 접하지 못했던 물품을 접하기 시작했고 이 물품 중 상당수는 바로 그림 재료들이었다. 이때 성모에게 가장 많이 사용하던 라피스 라줄리가 가장 많이 유입되기도 했다.


    그리고 템페라를 벗어나 이런 유려한 색채감을 낼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티치아노 때문이다.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다가 배의 돛을 제자에게 찢어오라고 한다. 그리고 난 후 그곳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캔버스”이다. 티치아노는 바로 캔버스를 최초로 사용한 화가이며, 유화의 다양한 기법을 마음껏 적용할 수 있었기에 그의 색채감은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자극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대부분 학문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한다. 솔직히 현장에서 그렇게 설명을 하지만, 받아들이는 분들이 다양해서 어렵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정리한 부분을 이야기하자면, 2가지로 설명을 한다.


    첫째, 종이 인형이다. 무슨 소리냐 하면, 아이들에게 종이 인형을 만들어 오라고 지시하면 아이들은 두 가지 행동을 보인다. 먼저 밑그림을 그리고 가위로 오리는 아이와 바로 종이에 밑그림도 없이 오려오는 아이들이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차이이다. 물론 르네상스 화가들도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 화가가 많다. 티치아노도 그 계열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선을 먼저 이렇게 풀어보자. 르네상스는 선을 먼저 그리고 난 후 색칠을 하는 스타일이고, 바로크는 색칠을 하다 보니 선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래서 바로크의 그림들을 보게 되면 마치 스푸마토 기법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지금 보고 있는 아담과 이브를 보더라도 티치아노는 외곽선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루벤스의 그림을 보면 외곽선들이 티치아노와 다른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색칠을 하면서 선을 형성하다 보니 깔끔한 느낌이 조금 줄어든다.


    둘째, 사람의 표현법이다. 흔히 드라마에서 중년 부부들의 대화를 보다 보면, “당신 나 사랑해?”,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라고 서로 하나이면서 다르게 표현을 한다. 그럼, 여기서 누가 르네상스일까? 보통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하는 남성이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를 보게 되면 철저한 절제미가 가미가 되어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게 되면, 한 젊은이의 모습 속에서 아름답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베르니니의 하디스가 페르세포네를 끌고 가는 조각상을 보면 어떤가? 다음 장면이 기대되면서 궁금해진다. 이처럼 조각에서도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차이가 명확하듯이 철저한 절제미를 꿈꾸던 르네상스의 미는 우리나라 남성의 모습으로 이해하면 빠르다. 그렇다면 바로크는 당연히 “당신 나 사랑해?”라는 여성의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맞다. 바로크의 그림을 보면 어떤가? 뭔가 모르게 감성적으로 밀고 들어온다.


    뒷부분 호세  리베라의 그림 “막달레나 벤투라에서 설명이 되겠지만,  엄마의 기구한 사연을 르네상스식으로 표현하면 철저한 절제미가 가미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고통의 한계는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라는 숙제가 따라온다. 하지만, 바로크식이라면 그에 대한 답은 확실하다. “느껴봐라.”이다. 이처럼 르네상스와 바로크 솔직히 어렵지 않은 구분이 존재한다. 물론  부분은 철저하게 그림 앞에서 머물러 살던 하이로와 클로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정리한 글임을 밝혀 둔다.


그림없는 미술관(YouTube) 운영자

https://m.youtube.com/c/ArtTalkJairo


#스페인미술 #프라도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미술관 #레이나소피아미술관 #성화강연 #미술강연 #작품해설가 #그림없는미술관 #jairoarttalk #브런치작가 #벨라스케스 #고야 #무리요 #엘그레코 #수르바란 #피카소 #미로 #달리 #히에로니무스보스 #티치아노 #루벤스 #아담과하와 #비교감상 #르네상스 #바로크


매거진의 이전글 티치아노의 카를로스5세의 기마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