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끊임없이 삶 주변에 머문다
틴토레토[Judit y Holofernes. TINTORETTO, JACOPO ROBUSTI.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77. P1 S00]
홀로페르네스와 유디트의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그림의 주제가 된 그림이다. 하지만 그려진 형태는 항상 2가지인데, 첫째로 머리를 자르고 난 후의 그림이던지 둘째로 잠을 자는 장면이다.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유디트는 좀 더 다른 개념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홀로페르네스는 아시리아의 장군으로 벨툴리아시를 파괴하러 왔다. 하지만 이 홀로페르네스 앞에 모든 이들은 무기력하게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를 찾아간 여인이 바로 유디트이다. 유디트는 결혼은 했으나 남편이 첫날 밤 죽게 되므로 처녀이면서 과부가 된 여인이다. 그렇게 자신의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았던 유디트는 나라를 구한다는 목적의 사명을 띠고 자신의 하녀와 함께 적장 홀로페르네스에게로 간다. 그를 바라보며 죽일 수 없자, 그가 잠든 후에 그의 목을 자르며 그 목을 들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문제는 자신의 배 속에서 자라게 될 아이가 바로 이 홀로페르네스의 아이가 되어버릴 것이라는 아이러니함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그림의 주제를 가지고 보티첼리, 카라바지오 등 많은 화가가 주제로 삼았던 그림인데, 그 내면의 또 다른 모습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아픈 사연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나라의 논개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또 다른 신들의 운명 속에 유디트의 삶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이 그림 역시 세례식처럼 그림의 방향이 전체적으로 보는 이의 각도로 이동을 한다. 다시 말해 목이 잘려 침대에 누워있는 홀로페르네스의 시신이 오른편에서 보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고 있고, 왼편에서 보면 왼편으로 그 몸이 기울어져 있다. 아무리 작은 배경과 주변 사물을 통한 착시의 현상이라고는 하지만, 틴토레토의 이러한 스타일의 그림은 전무후무한 그림으로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경지의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