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르바란의 깊은 내면의 통찰이 보이는 그림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Cristo crucificado, con un pintor. ZURBARÁN, FRANCISCO DE.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있는 화가. 1650. P1 S00]
스페인 바로크 회화의 대표 화가 수르바란(1598-1664)은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 특히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테네브리즘(명암대조기법)에 스페인의 종교적 감수성을 결합하여 최고의 종교 미술을 발전시켰다. 수르바란은 대부분 세비야에 있는 오래된 수도원이나 성당에서 의뢰한 작품들을 제작했으며, 그의 많은 작품 속에는 사도나 성인, 성녀, 수도사들의 기적이나, 환상, 황홀경에 빠진 몽환적 비전에 사실주의적 묘사를 통해 작품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수르바란의 작품에서는 화가 자신의 강렬한 종교적 신앙심마저 느껴진다.
수르바란의 작품<십자가상 앞의 화가>은 주문이 아닌 화가 자신이 개인적인 이유로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은 누구의 주문 때문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오른쪽에 그려진 얼굴이 화가의 얼굴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화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자화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그림이 성 누가를 그린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성 누가는 초기 동방전통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누가는 예루살렘에 계시던 성모 마리아를 뵐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성모 마리아의 초상화를 여러 개 제작해 섬겼다고 한다. 그래서 성 누가는 화가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수르바란의 그림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의 모습이 담겨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수르바란이 자신의 직업, 화가로서 자신이 그린 십자가 위에 예수를 보고 있는 장면이다. 오른쪽 화가는 왼손에 아직 마르지 않은 물감이 발린 팔레트를 들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에 얹고 십자가 위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착하고 성실한” 화가로 일에 충실하게 임한 모습이다. 그림을 그리던 중, 화가는 예수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상태이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의 얼굴도 화가를 향하고 있다. 예수는 손과 발에 커다란 못이 박혀 고개를 가눌 힘조차 없는 고통스러운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화가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다. 이렇게 예수는 우리의 삶 안에서 영적 일(영적 예술)을 하는 데 성공하도록 끊임없이 도움을 주고 계신다는 의미를 알리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화가는 명상 속에서 화가 자신이 표현한 예수와 교감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화가는 예수와 함께 기쁨을 나눈다. 화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고, 입은 살짝 벌려져 있는데, 이것은 특유의 황홀경에 빠진 표정 묘사이다. 수르바란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십자가의 죽음을 마다치 않으신 그리스도와 대면하게 되는 희열의 모습을 조용히 드러내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값진 보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맡기셨듯이, 수르바란은 화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 재능(그림)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주어진 그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숙고한 후, 그림을 그리는 자기 일을 일종의 종교적 수행으로 본 것이다. 그는 “쓸모없는 종”이 되어 “다가갈 수 없는 빛”으로 내던져지는 게으른 종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자신이 화가라는 직업을 통해 해답을 얻고, 활동적 삶으로 많은 결실을 보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