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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의 펠리페4세 전신초상화

왕의 이미지는 외모가 아닌 내면에서 풍겨지는 온화함이디라고 말한 화가

by jairo

벨라스케스. 페리페 4세. 1623.

벨라스케스 방으로 가서 보면, 먼저 왼편의 화려한 기마상 그림이 있다. 그 갑옷을 입은 사람은 펠리페 3세의 모습이고, 그 그림 오른편은 서 있는 사람이 지금 보는 전신초상화로 펠리페 4세의 모습이다. 펠리페 4세는 당시 예술적 작품들을 수집하느라 국고를 탕진하는 수준에까지 갔고, 당시 스페인의 땅이었던 미국이 스페인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 왕이다.


젊은 군주의 모습으로 세비야 출신의 벨라스케스를 만나게 되고, 벨라스케스는 강력한 군주의 힘을 상징적으로 그려보았다. 특히 티치아노의 벨라투라 기법을 사용한 듯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놀라운 것은 한 땀의 붓 터치로 마무리된 것을 보게 된다. 다른 화가들과 달리 가벼운 터치로 마무리를 하는데, 놀라운 것은 그 터치가 빛의 흐름에 의해 브레다 함락에서 스피뇰라 장군의 모습처럼 입체감 등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펠리페 4세는 다른 그림과 다른 패턴인데, 아마도 루벤스의 영향이 미친 듯하다.


자신의 첫 초상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펠리페 4세는 줄곧 벨라스케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두 그림의 차이는 크게 나지 않는다. 다만, 왼편은 상반신만 나타나 있고 오른편은 전신이 다 나와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둘 다 목에 과거 기사들이나 왕족들이 차던 블라우스 위에 하는 레이스가 없다. 그리고는 철로 만든 받침을 해 놓았다.


한참 이 작품을 설명하는데, 옆에 한 단체팀이 와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가이드가 대뜸 “저 목 받침대는 침을 흘리는 것 때문에 받쳐놓은 것이다.”라고 말을 하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같이 온 단체팀들의 얼굴을 순간 보았다. ‘저분들은 여기 프라도 미술관에서 무엇을 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갯소리 좀 하자. 오래전 대한항공 기장님과 승무원들과 세고비아 알카사르에서 “죽은 여인의 모습”이라는 세고비아 전설을 이야기하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면서 “솔직히 난 저 누워있는 여인이 어머니인데, 자식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은 것이 너무 안타깝다. 그리고 매일 죽은 여인! 죽은 여인! 하니 싫어서 그냥 누워있는 임산부라고 하면 어떻겠냐? 봐라! 배도 나와 있지 않으냐?”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바로 옆에 단체팀이 왔는데, 그 일행 중 한 사람이 우리 팀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더니 대뜸 자기 팀 가이드에게 가서 “여기 설명 좀 해 주세요.” 하는 것이다. 그러자 가이드가 당황해하는 것이다. 아마, 세고비아의 전설을 몰랐나 보다. 아무튼, 내 이야기를 조금 듣고 있었던 가이드는 “죽은 임산부가 누워있는데, 자식이 속 썩여서….” 하며 비슷하게 맞추기는 했다. 아마, 펠리페 4세의 목 받침대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사실 펠리페 4세가 목 받침대를 바꾼 이유는 간단했다. 국가 재정이 바닥이 나고 백성들이 원성이 일어날 때 펠리페 4세가 선택한 것은 “검소함”을 상징하기 위해 선택한 목 받침대였다. 바로 “사치 금지령”의 목적으로 시작된 모습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유전적 결함의 하나가 주걱턱이라 해서 한때 우리나라 텔레비전에도 “주걱턱의 진실! 턱수염의 시작! 펠리페 2세”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치열 구조상의 문제 때문에 받침을 한 것이 아니라, 왕실의 상징이었던 목 받침대가 검소함의 의미로 변형을 이루었고 쇠로 된 단순한 목 받침대를 사용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원그림과는 다르다. 벨라스케스가 처음 그렸을 때는 자세히 보면 망토 왼편에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 망토를 배경 선까지 가득 차게 그렸다가 줄였다. 그리고 왼편의 다리 역시 더 가늘고 날씬하게 그림으로 인해 그 옆에 작은 자국이 남아 있게 되었다.


카를로스 5세의 뮐베르크 전투 오른편에 있는 펠리페 2세의 초상화에서도 손에 종이를 들고 있는데, 왕실의 상징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모습을 비추고 있는 의미이다. 그리고 목 부분에 걸려 있는 금목걸이에 왕실의 문장이 기록되어 있지만, 희미해서 보이지를 않는다. 그리고 왼손 옆에 차고 있는 칼 역시 망토의 어두움에 가려져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초상화를 펠리페 4세는 만족해했을까? 전반적인 배경은 마치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의 배경처럼 그려져 있다. 바로 뒷배경의 구분 선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초상화와 달리 바닥과 벽의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망토의 그림자와 탁자와의 그림자가 경계선을 드러내는 듯 보일 뿐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배경 속에서 검은 옷으로 꾸민 펠리페 4세의 초상화에서 유독 빛나는 것은 얼굴이다. 솔직히 왕은 화려함보다 그 얼굴에서 빛나는 인자함과 온유함이 대세가 아닐까? 그래서 벨라스케스는 이러한 모습으로의 왕을 드러냈던 것이고 펠리페 4세는 가장 흡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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