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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와 아라크네의 이야기

그리스신화를 삶의 한 이야기로 승화시켜 버린 화가

by jairo

디에고 로드리게즈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Las hilanderas o la fábula de Aracne. VELÁZQUEZ, DIEGO RODRÍGUEZ DE SILVA Y. 아라크네의 우화. 1636. P1 S00]

보통 동력을 얻으려면 사물을 움직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다. 이 아라크네를 모작했던 고야의 그림 역시 “옷을 벗은 마하”, “옷을 입은 마하”를 보고 나서 돌아서면 바로 앞에 보이는데, 정말로 어색하기 그지없다. “고야가 저렇게 그렸단 말인가?”라는 말이 저절로 입가에 새어 나오게 된다.


정지 상태의 그림은 사진처럼 움직임을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슴머리”의 움직임이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진행을 드러낼 때 같은 공간에 같은 사람들을 시간의 연속 선상에 놓고 그렸다. 이미 봤던 보티첼리와 협력자들의 작품 “나스타지오 데그리 오네스티”에서 말이다. 이전과 이후를 같이 그림으로 이해를 도울 뿐 한 장면으로 모든 움직임을 그려낸 화가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림을 완성한 것이 바로 벨라스케스이다. 사슴 머리는 정지화면이었지만, 사실 순간이 모습 속에서 곧 변할 상황까지 느껴지는 그림이었다면 “아라크네”는 보고 있는 장면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기법이 표현되어 있다.


회전의 속도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림 왼편의 물레를 돌리고 있는 노파의 모습이다. 노파가 열심히 물레질하는데, 그 원형의 속에 붓 터치는 물레가 회전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일반적으로 동작의 전후를 보여주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줌으로 속도감을 묘사한 것이다.


또한, 이 그림은 “아라크네 우화”로 자신의 교만함이 결국 아테네에 벌을 받는 장면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다 그림 속에 표현되어 있다. 뒷배경으로 등장하는 모습과 태피스트리의 모습이 바로 아라크네의 미래가 된다.


아라크네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리디아 출신의 아라크네는 실 잣는 기술이 특출해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님프들까지도 아라크네의 실 잣는 모습을 지켜보러 왔을 정도였다. 결국, 이런 모습은 자신이 대단하다는 우월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윽고 최고의 실 잣는 아테네에 도전하게 된다. 하지만 수놓는 여인들의 수호신인 아테네는 노파로 분장해서 아라크네를 타이르지만 이미 허영에 빠진 아라크네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아테네는 본래의 모습으로 변해서 그 도전을 받아준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내용을 만들어낸다. 아테네는 감히 신들에게 도전했던 사람들의 가혹한 최후를 만들었지만, 아라크네는 유럽의 시조가 되는 제우스가 에우로파를 속여 에게해를 건너는 루벤스의 그림 “에우로파”를 그린다. 아라크네 바로 옆에 “에우로파”를 전시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아테네가 아무리 아라크네의 태피스트리를 찾아보아도 흠잡을 것이 없었다. 단지 신들에게 대항하는 아라크네의 마음 외에는 말이다. 결국, 아테네는 아라크네의 작품을 찢어버리고 베틀의 북으로 아라크네를 내려친다. 이에 겁을 먹은 아라크네는 죽으려 했지만, 아테네는 아라크네를 거미로 만들어 영원히 실을 짓는 감옥에 갇히게 했다.


그런데 벨라스케스는 왜 왼편의 고동색 옷을 입고 있는 노파로 분장한 아테네보다 주변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더 부각시켜 놓았을까? 아마도 가사 노동은 해도 표시가 안 나기에 당시 이런 마음을 담아 그리던 “보데곤 방식”이 드러남으로 여인들의 애처로운 상황을 마음에 담았던 벨라스케스의 배려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보데곤은 술집이나 식당, 음식을 배경으로 서민의 생활방식을 보여주는 그림을 말하는데, 벨라스케스는 “바쿠스의 승리”, “불카누스의 대장간” 등에서 보듯이 이 보데곤 형태와 다양한 신화 그리고 종교 그림을 통합시켜 하나로 그려낸 최초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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