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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거장 인간의 순수함을 그려낸 무리요

벨라스케스의 화폭과는 다른 따스함의 화가

by jairo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Sagrada Familia del pajarito. MURILLO, BARTOLOMÉ ESTEBAN. 성가족과 새. 1650. P1 S00]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따스함이 느껴지는 일상 가정의 모습이다. [자기 일에 묵묵한 아빠의 모습 그리고 그 옆에서 미소를 짓는 아내의 모습 그리고 아빠의 무릎에 기대어 강아지와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꼬마 아이 그리고 그 아이의 손에 들린 한 마리의 새] 이것이 이 그림이 보여주는 전부다. 그저 평범하지만, 그 제목을 접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다르게 다가온다. 이 그림의 제목은 [성가족]이다. 이 그림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분이 “이 그림이 뭐가 다르다는 거야? 아무리 둘러봐도 특징은 그저 평범하고 그림의 스타일도 뭐 지극히 평범해서 특징이 없어.”라고 하셨다. 맞다. 그저 평범한 가족의 단란함이다. 그런데 이 그림 이전의 그림을 우리는 보아왔다.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에서, 파르미자니노의 그림에서 그리고 프라도 미술관을 떠나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서도 말이다. 바로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1490년대에 동정녀 마리아의 교리가 원죄 없는 잉태와 함께 교리로 체계를 잡아가면서 그림의 규칙들이 생겨난다. 요셉은 70세 정도의 노인으로 항상 그림의 중심이 아니라 제삼자로 등장을 한다. 0층의 라파엘로 그림에서 보듯이 말이다. 그런데 톨레도 대성당의 엘 그레코의 엘 에스폴리오 옆에 있는 그림처럼 무리요의 그림 속 요셉은 30대의 가장으로 보이며, 자신의 직업인 목수의 삶에 대한 그림의 배경이 등장하며 메인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처음 보는 모습을 보여준다. 집안에서 일하는 평범한 가정주부의 모습으로 등장을 한다. 당시의 균형을 깨뜨린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된 이유가 바로 요셉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70세의 노인이 아니라, 30대의 젊은 사람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절제와 사랑으로 임한다는 모습으로 재인식이 되면서 가정을 지키는 수호성인으로 요셉이 자리를 잡게 되고 가정의 중심적 위치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가운데 아기 예수의 천진난만한 모습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해맑은 미소로 인한 잔잔한 감동이다. 바로 이런 따스한 가정에서 자란 예수가 그 사랑의 실천이 가능했다고 생각한 것이 무리요의 그림의 특징이다. 그래서 무리요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따스한 그림”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림을 설명하면서 이곳에서는 위대한 그림이 존재한다며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 위대한 그림을 넘어서는 사람의 가슴을 따스하게 녹여내는 따스한 그림이 있다고 늘 말을 한다. 그 그림이 바로 이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성가족이다.


9살에 고아가 된 무리요는 당시 세비야의 놀라운 정책 덕분에 구김살 없이 자라게 된다. 이후 성장을 하여 훌륭한 미술가가 되고 자신 자체도 아카데미아를 9개 넘게 만들며 당시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지원자로 나서게 된다. 이런 환경 때문일까? 무리요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주로 그림으로 그리는데, 늘 해맑고 구김살 하나 없는 그림으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으면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와 행동 때문에 입가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게 하는 가슴 따스한 남자 무리요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새는 장차 일어나게 될 자신의 “희생”을 이야기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칭하고 18세기 이전에 등장하는 강아지는 “충성”을 의미한다. 다른 그림을 볼 때도 이런 규칙을 기억하고 그림을 본다면 그림의 의미들이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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