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가 들려주는 심리학
11. 알브레히트 뒤러[Alberto Durero. Jesús entre los doctores. 예수와 성전 안에 있는 학자들. 1506.]
[묵시록의 네 기사들]이라는 최고의 작품을 남겼던 알프레히트 뒤러는 많은 “아담과 이브” 시리즈를 판화로 제작해서 자신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특히 유일한 아담과 이브 시리즈 중 유화인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에서 만날 수가 있다.
뒤러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담았던 풍경들은 유럽 풍경화의 화풍을 대폭 수정하도록 이끄는 계기가 되었고, 르네상스에서 접한 인체해부학은 그에게 인체비례학이라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완벽한 모습을 구현하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우리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담과 이브”를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림보다는 판화로 유명함을 얻었던 뒤러는 사실 “마르틴 숀 가우어”의 판화의 놀라움을 만남으로 접하고 싶었으나 뒤러가 보러 가기 2년 전 마르틴 숀 가우어의 죽음으로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뒤러는 여전히 그의 작품 속에서 마르틴 숀 가우어의 판화의 놀라움을 잘 활용해 자신의 그림의 영역을 무한대로 확대시켜 나갔다. 특히, 날카로운 강철바늘로 동판에 그림을 새기는 동판화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해서 판화를 제작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이 모습은 영화 “고야의 유령”에서 잡혀간 여인을 위해 고야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있다. 그때 그 모습이 바로 이 드라이포인트 기법에 의한 에칭기술이다.
2차 베네치아 여행에서는 조반니 벨리니, 조르조네, 티치아노, 팔마 일 베키오 등의 화가들을 접하게 된다. 이때 얻은 색채감의 기법은 오늘 예수와 성전 안에 있는 학자들에서도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베네치아 회화계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뒤러는 머물기를 거절하고 자신이 고향 뉘렌베르크로 돌아가서 독일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 그림은 후에 많은 영향력을 준 느낌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에서 느껴지는 시선들과 프라이 후안 바우티스타 마이노가 그린 [오순절]에서도 시선처리를 말이다. 물론 이런 시선 처리는 이전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다. 파올로 베로네세가 그린 [성전에서 유대교사들과 대화를 하는 예수]의 모습에서도 이런 현상을 두드러진다. 마치,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라는 것을 말하려는 듯 강렬한 이미지로 보여진다. 이 그림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재미나게도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의 가족사진을 보기를 꼭 추천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12살의 어린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유대인 교사들과 랍비의 모습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손을 통해 전반적인 이야기를 이해하게 해 준다. 어린 예수의 손가락을 보면 무엇인가?를 말하며 의미들을 설명하는 모양이다. 그러자, 제일 오른편 구석의 사람은 어린 예수의 말 자체를 듣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며 거부의 몸짓을 보인다. 그리고 예수 바로 왼편의 젊은 남자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이 생각한 가치관이 무너짐에 반대하는 거부의 눈빛이다.
예수 오른편에 모자를 쓰고 있는 자는 예수의 말을 가로채려 하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참된 논쟁은 우김이 아니라, 논리적 대화와 올바른 경청이 주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이러한 모습이 올바른 태도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왼쪽 아래 책을 덮고 책에 손을 얹고 오직 어린 예수의 입을 주목하는 남자를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의 테두리를 벗어나 그 주인공을 접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오른편의 남자는 옆에 책을 덮은 남자에게 자신이 찾은 글을 보라며 내밀고 있다. 다시 말해 어린 예수가 말하는 내용에 대해 꼬투리를 잡은 것이었다. “저 아이는 이 부분에 대해 틀렸오!”라며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싶은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왼쪽 위에 있는 사람은 책의 내용과 예수의 이야기가 맞는가를 비교 분석하고 있는 중이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정리하는 것은 아까 말했듯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만 듣는다.”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일까?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꼭 떠오르는 그림이 프라도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틴토레토의 세족식”이다. 360도 어느 방향에서 그림을 봐도 다 보는 이의 관점으로만 그림이 보인다. 절대 화가의 주장보다는 바라보는 이의 이해에서 그림이 보이듯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성전에서의 예수와 유대교사 그리고 랍비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