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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불통 ADHD남아의 수학행보 결정 [2편]

by 그림크림쌤

티라노는 학원에서 버티는 사이, 분명 수학을 다시는 하지 않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었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멍석을 대놓고 깔아주며 "네가 쉬고 싶은 만큼 쉬어도 좋다"라고 했더니, 부인하지 않고 도리어 순순히 알겠답니다.


'그럼 그렇지. 그동안 해놓은 게 있는데 수학이 정말로 싫어진 게 아니었구나! 무뚝뚝하고 강압적인 지금 선생님이 힘든 거였구나. 이 학원이 마음에는 드는 거고.' 바보같이 이제야 진실을 깨닫게 된, 40이 넘은 이 나이에도 여전히 눈치가 부족한, 중증 ADHD인 교사엄마가 바로 저입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학원에 연락해, 선생님이 바뀔 때까지 쉬어도 레벨테스트 없이 최상위반에 재입반 가능한지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상담 선생님께 '아이가 지금 선생님 스타일과 맞지 않아 힘들어한다, 그런데 지금 학원은 저도 아이도 너무 마음에 든다'며 자초지종을 얘기했습니다. 아이 어필도 잊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 정이 떨어진 2학기 들어선 수학 숙제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해놓은 게 있어서 10월 모의고사까지 전부 1등급이 나왔어요. 심지어 10월 모의고사에서는 9월까지 보다 더 잘 봤고요!"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레벨테스트 당시, 부원장님께서 '수학 과학 괴물이 될 아이'라고 하실 정도로 수학 감각이 좋아요. 그러니 레벨테스트 없이 재입반 가능할까요?" 상담 선생님은 원래는 모의고사 1등급 인증과 함께 레벨테스트를 보아야 한다고, 자세한 건 부원장님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며 말을 아낍니다. 말을 잘해달라고 사정사정해 놓습니다.


다행히 오늘이 지나기 전에 연락이 옵니다. "부원장님이 티라노를 기억하시더라고요. 성실하진 않지만 머리가 엄청 좋다고, 레벨테스트 보지 않아도 된대요. 선생님 바뀌기 직전에 어머니께 전화드리신대요." 전화인데도 고개를 90도 숙여서 감사하다며 인사하는, adhd 아이를 키우기에 자꾸만 미안하고 감사할 일 투성이인 교사엄마가 바로 저입니다. (참고로, 중1 adhd 진단 당시 티라노의 웩슬러 지능은 고작 89였다. 처리속도는 경계선 지능이었다.)


"티라노, 부원장님이 너 기억하신대! 성실하진 않지만 수학 감각이 엄청 좋아서 레벨테스트 안 봐도 된다고 하셨대! 2달 후, 12월 말이면 선생님 바뀐대. 그때 들어가면 된대!"


'머리가 좋다'를 '수학감각이 좋다'로 슬쩍 바꾸어 알려줍니다. 지능과 같이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에 귀인하여 칭찬하는 건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수학 감각은 노력하면 바꿀 수 있는 것이고요. 웃긴 건, 분명 '수학 안 하고 싶은 거다'며 악을 쓰고 큰소리쳤던 아이입니다. 그런데 2달 후에 선생님 바뀐다, 레벨테스트도 안 봐도 된다더라는 제 말에 어릴 때처럼 환하게 웃습니다. 이때를 놓칠 순 없습니다. 마음 읽기에 돌입합니다.


"기말고사 신경 쓰지 말고, 두 달 동안 푹 쉬어. 두 달 쉰다고 해서 그동안 네가 쌓아놓은 수학실력이 어디 가는 게 아니야. 영어 봐봐. 6학년 때 이후부터 학원 중단됐는데, 영어 듣기도 잘하고, 자막 해석도 잘하잖아. 두 달 동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쉬는데 집중해."


환하게 웃으며 알겠답니다. '어라? 이 정도 얘기도 다 들어준다고?' 마음 읽기는 성공했으니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합니다. "12월 말에 새 선생님에게 들어가면, 그땐 숙제도 조금씩은 해가야 해. 알았지? 약속해!"

저의 숙제하라는 말에 발작버튼도 안 눌리고 순순히 알겠답니다.


혹시 압박감이나 불안을 느낄까 봐 여유를 주는 말도 합니다. "네가 레벨테스트에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레벨테스트 안 보게 해달라고 요구한 게 아니야. 두 달 후에 레벨테스트가 예정돼 있으면 불안해서 맘 놓고 쉬지 못하니까, 압박감 줄여주려고 그런 거야." 그랬더니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안도하는 표정입니다.


한 가지 더 전합니다. "최소한 한 군데는 돌아갈 곳이 확보되어 있어야 맘 놓고 쉬잖아. 그래서 더 열심히 어필했어. 이 동네에 여기 말고도 학원 많아. 게다가 돌아갈 곳도 확실하고. 그러니까 두 달간은 맘 놓고 푹 쉬어. 알았지?


그렇게 티라노는 하나 남은 수학마저 잠시 쉬었다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스스로 한 결정을 부모인 우리가 순순히 따라준 것 말입니다. 신기한 건 자율성을 진심으로 존중해 주었더니, 애초 제 의도대로 결국 두 달만 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고작 두 달이냐며 발작버튼 눌렸던 아이가, 두 달 후 지금 반의 새 선생님에게 복귀할 수 있다는 말에 저리 환하게 웃습니다.


이거였습니다. 아이의 진정한 자율성 존중, 그리고 진짜 신뢰란 어떤 건지 말입니다. 티라노는 이렇게 6년 반 동안의 고된 수학 행보를 잠시 쉬면서 재충전하기로, 스스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번 기말고사는 60점은 넘기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전 정말로 불안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너무 편안하고 홀가분해졌습니다. 저의 과도한 기대를 줄였더니, 도리어 아이의 바닥났던 의지가 돌아오고 있음이 느껴지거든요.


'불안을 자녀에게 들키지 마세요. 부모의 일방적인 생각을 아이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그게 자녀와 가까워지고, 자녀가 스스로 해낼 힘을 갖게 하는 시작점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수학마저 쉬게 된 adhd 고등학생 티라노의 체스와 게임 과몰입 근황이 이어집니다.


<ADHD 교사엄마가 ADHD 아이에게 전하는 학교생활백서(가제)>는 다음 달인 12월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편집장님께 '글이 아주 재미있다, 유익한 내용도 많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원고입니다. 투고 당시, 또 다른 출판사에서는 'A부터 Z까지 다양한 고민과 걱정을 해소해 주는 책'이란 말도 들었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표지사진은 2년 전,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받는 티라노가 백조가 되어 날아갈 모습을 상상하며 한 올 한 올 제가 직접 그린 유화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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