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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주미 Aug 17. 2023

3. 제주에서의 삶

제주도에서는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나


 집이 점점 사람 사는 곳처럼 되어 갈 때쯤 일자리를 찾았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1년에 한 번 내는 집세 300만 원의 부담 때문이다. 생활비는 적게 들어도 한 달에 25만 원을 모아 놓을 생각을 안 했다. 집세 내기 한 두 달 전에 취직이라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월급은 조금 받아도 재밌는 일을 하고 싶었다. 찾아보면서 알았지만, 어디든 월급은 조금 주니,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12시간을 식당에서 일하지 않는 한, 회사에서는 도시와 같은 월급은 안 준다. 그래도 도시에서보다 들어가는 돈이 적어서 적게 받아도 살아진다. 우리는 한 명이 취직을 하면 한 명은 편하게 쉬자는 생각으로 한 명씩 번갈아가며 취직을 했다. 처음 내가 먼저 취직한 곳은 신설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다. 정확히 2번, 창간호와 2호까지 내고는 그만뒀다. 그래도 그동안 몇 개월 정도는 다니면서 사람들 인터뷰도 많이 하고, 제주도 문화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남편이 취직을 한 곳은 제대로 된 회사였다. 원래 프로그래머였지만, 제주도에서 개발일은 찾기가 더 힘들다. 제한된 회사지만 일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연봉을 내려야 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돈을 많이 벌자고 제주도에 내려온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건 괜찮다. 제주도에서도 똑같이 출퇴근을 해야 하지만, 지하철을 타는 갑갑함보다는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는 일은 다르다. 출퇴근 길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우리는 차가 없어도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갔다 오고, 낚싯대를 메고 버스를 타기도 하고, 친구가 오면 공항 픽업도 버스를 타고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버스를 타고 공항 픽업을 갈 이유가 있나 싶지만, 그때는 그랬다. 함덕에는 공항 가는 버스 한 대와 구제주 동문시장 가는 버스 한 대, 그리고 3시간쯤 걸리는 서귀포 가는 버스가 있었다. 지금은 버스 노선을 외우지 못할 만큼 많아졌다.


노란집의 백년초와 돌담


 지금 생각해 보면 함덕에서 많은 일을 해왔다. 델문도라는 카페가 공사를 할 때는 그 앞에서 커피도 팔아 봤다. 물론 지나가던 카페 사장님께 허락은 받았다. 그러면서 좌판이 괜찮다는 걸 알고, 종류를 늘려갔다. 텀블러를 제작해서 팔기도 하고, 잼을 만들어서 팔기도 했다. 여름 성수기에만 빌려주는 곳에서도 살짝 발을 걸쳐보기도 했다. 그러다 델문도 카페에 취직을 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물론 플리마켓도 나가봤다. 다양한 일이 있고, 어떤 일을 하건 시선 따위도 없고, 재미있는 일들은 많다.


한치잡이 배에서 사용하는 낚싯줄


 그러던 중 또 하나 들었던 생각은 '가게를 할까'였다. 도시보다는 쉽게 가게를 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냥 작은 가게를 꾸려나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실제 가게를 해 본 적은 당연히 없다. 동네분들에게 작은 가게 나오는 거 있으면 알려 달라고 소문을 냈다. 이렇게 몇 분에게 얘기해 놓으면 소문은 추진력을 띄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금세 결과가 돌아온다. '저기 누구네 비어있는 곳이 있는데, 싸게 빌려준다더라', '00 가게 이번에 나간대' 이런 말이 들려온다. 우리는 작은 소품샵 겸 카페를 하고 싶었다. 이 당시에 함덕에는 소품 가게도 없었고, 카페도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낚시를 하다 친해진 선장님이 계셨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다. 그때 우리는 지미오름을 오르고 있어서 숨이 차올랐다. 생각도 별로 안 해보고 가게를 하겠냐는 말에 덥석 '하겠습니다'를 외쳤다. 일단 우리끼리 회의를 해야 했고, 그곳은 작은 곳도 아니었고, 카페 자리도 아니었다. 함덕 포구 앞에 있는 건물이었다. 작은 포구 앞에서는 회와 신선한 해산물에 소주를 마셔야 한다. 이건 너무 당연한 진리이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선술집을 하자고 결론을 냈다. 남편은 잘 다니던(심지어는 고속 승진까지 했던) 회사를 그만뒀고, 횟집에서 일을 배우기 위해 다시 취직을 했다. 그렇게 선술집은 문을 열었다. 우리 둘은 난생처음 가게를 하게 된 것이다.



가게에 매일 오던 고양이


 직접 못질을 하고, 페인트칠을 하고, 그리고 별로 꾸밀 것 없이 선술집은 문을 열었다. 어디에도 오픈을 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손님이 몰려왔다. 우리는 첫날이니까 우리끼리 술이나 마시겠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이 가게는 3년 반을 잘해나갔다. 지금은 문을 닫고, 다시 여유로운 생활로 돌아왔다. 처음 해 보는 가게는 그 당시 늦게까지 하는 술집도 없는 시기적인 이유와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우리가 잘해서라는 자신감이 잘되게 만들어줬다. 재밌었던 시간이었고, 아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그때쯤 함덕은 하지 않아도 될 개발이라는 것을 겪어야 했다. 호텔이 많이 생겼고, 편의점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프랜차이즈도 들어오고, 새로운 건물도 많이 생겨났다. 우리가 가게를 할 때만 해도 저녁 9시면 깜깜했던 마을이 이제는 자정을 넘겨도 환한 마을이 되었다. 시골다운 모습을 잃어간다고 안타까워하다가도 저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면 아직은 이곳에서 살아도 되겠다는 안심이 마음속에 새겨진다.


 "우리 3년 반동안 포구 앞 선술집을 하면서 있었던 일들"


 #episode1, 생선을 지나칠 수 없는 고양이와 만남

 동네 고양이는 다 모이는 곳이 바닷가 횟집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우리는 사료까지 챙겨줬으니, 더 몰려왔다. 우리가 출근을 하면 동네 골목길 돌담에서부터 뛰어오는 고양이가 있었다. 마치 우리 가게에서 일이라도 하는 고양이처럼 늦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뛰어와서 제일 먼저 주는 사료를 먹었다. 그 고양이는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은 회까지 야무지게 먹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름도 지어줬다. '알탕이'.

 알탕이는 처음 왔던 고양이가 낳은 새끼였고, 처음 오던 고양이가 안 와도 알탕이는 혼자서 꾸준히 우리 가게를 방문했다. 어느 해 봄에는 제비가 가게 처마밑에 둥지를 만들었다. 잔가지를 하나하나 물고 와서 둥지를 만드는 것까지 봤고, 알을 낳았고, 알이 부화하는 것까지 지켜봤다. 비가 많이 오던 날에 둥지가 떨어져서 제비 새끼 네 마리가 울고 있었다. 인터넷 정보를 열심히 찾아서 받침대 역할을 하는 바구니 안에 둥지를 넣고, 진흙으로 날개가 젖은 새끼 제비들을 닦아주고 다시 제 위치에 걸어줬다. 그렇게 제비 식구와 그 봄을 나고 있었다. 어느 날, 새끼 제비가 낮은 비행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 순간을 기뻐하고 있었는데, 알탕이는 아니었다. 언제부터 노렸는지 모르겠지만, 낮게 나는 새끼 제비를 낚아채서 도망갔다. 알탕이를 쫓아 갔지만, 새끼 제비를 구할 수는 없었다. 밥도 넉넉히 줬는데, 왜 새끼 제비를 물고 갔는지... 그리고 알탕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다시 왔다.


함덕 포구


 #episode2,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임

 우리가 가게를 열었을 때쯤, 함덕에는 우리처럼 이주한 사람들이 가게를 하나 둘 열기 시작했다. 늦게 끝나면 모두 우리 가게에 모여서 술 한 잔을 기울이며, 그날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때로는 같이 웃고, 때로는 위로해 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던 순수한 모임이었다. 경쟁 심리가 없던 시절이었다. 손님이 없어서 한가하다면 서로 손님을 안내해 주고, 필요한 게 있으면 서로 돕던 사이였다. 새벽 2시에 만나던 그 사람들은 그 시절에는 우리처럼 초보 사장이었고, 제주를 함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episode3, 기억에 남는 손님들

 고양이 사료를 사는데 보태라고 돈을 주신 손님이 계셨다. 서울에서 여행을 온 손님인데, 사료와 간식을 챙겨 놓고 놔두고 왔단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따뜻한 손님이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손님이 유난히 많이 있었다. 당연히 가게 앞에 고양이가 대여섯 마리는 있으니까.

 첫 손님도 기억에 남는다. 여행을 온 부부였는데, 우리 가게가 문을 열자마자 훅 들어온 첫 번째 손님이었다. 장사 첫날이라고 말을 하고(앞으로 일어날 실수에 대한 양해를 미리 구하고), 몇 마디 나눴었다. 우리에게 '참 용기가 대단하다'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한 해, 두 해 지나고 장사가 힘들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다는 걸 알았다. 그때 용기가 대단하다고 말한 의미를 알아가게 됐다. 첫 손님이었던 부부는 다음 여행에도 우리 가게를 찾아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날 많은 인사와 따뜻함을 받으며 마무리했다. 그때가 2019년 8월이었다. 그 해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팬데믹 코로나를 겪으면서 그때 가게를 접은 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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