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제주도를 좋아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여행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철을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여행이다. 캠핑장비를 챙겨서 나가면 어디든 캠핑하기 좋은 곳이 지천에 널려있다. 여름에는 수영복만 입고 걸어가면 바다에서 수영을 할 수도 있다. 낚싯대를 메고 나가면 바다낚시를 할 수 있고, 돗자리를 가지고 잔디에 나가면 평화로운 하루가 된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떠나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 이곳에서 여행이란 '집 밖을 나가는 것'이다. 여행이 삶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삶이 여행이 됐다.
수국한송이와 고양이 [본]
2003년생 고양이 [요다]
교외로 나가려고 마음먹고 출발했다가, 꽉 막힌 교통체증에 짜증부터 밀려오는 것이 도시에서 삶이었다. 그래서 밤에 출발해서 아침에 도착해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다. 이건 20대에나 가능했던 여행이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 나이가 되면, 이런 것도 힘들기 마련이다. 하. 지. 만, 제주도에서는 섬 반대편을 가는 일도 차가 밀리지 않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해안도로를 달려 멋진 드라이브로 여행지에 도착할 수 있다. 당연히 제주도에 산다고 매일 어디를 가는 건 아니다. 퇴근하고 집에 있다가 바람을 쐬고 싶으면,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하늘의 별도 보고, 파도 소리도 들으면서 내일을 위해 충전한다. 이런 여행 같은 삶이 좋아서 제주에서 삶이 지속되나 보다. 제주도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있는데, 우리 부부보다 일곱 살 정도 어린 부부다. 그들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제주도에 온 지 일 년도 안된 그들은 매일 오름을 오른다고 했다. 매일 오름을 올라도 일 년이 넘게 오를 오름이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좋다고 했다. 매일 오름을 오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부부는 아픈 강아지와 함께 매일 오름에 올랐다. 강아지는 건강해졌고, 아마 그 부부도 건강해졌을 것이다. 이들에게서 받은 신선한 충격으로 우리도 오름에 오르고 싶어졌다. 제주도에 살면서 오름을 오르는 것은 특권이다. 여행을 와서도 시간을 내지 않으면 쉽지 않은 게 오름 오르기다. 우리는 그 한 복판에 살면서 오름을 오를 수 있는 특권을 너무 누리지 않고 나날들을 보냈다. 바다가 지겨워져서는 절대 아니다. 바다는 항상 새롭고, 매일 노을을 봐도 다음 날 노을이 기다려지고, 경이롭다. 오름에 오르는 것이 부담이 됐지만, 일단 주말에 한 곳이라도 가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오름에서 맞이 하는 노을의 따뜻함
오름을 오르는 것은 마음에 시원한 바람을 넣어주는 것이다.
제주도 오름은 368개가 있다고 한다. 사막 속에서 아직 못 찾은 피라미드처럼 오름도 계속 새로운 오름이 생겨나고 있다. 사실 오름은 화산 폭발로 만들어졌지만, 새로운 오름이 나오는 것은 인간이 발견하고 이름을 지어서 개수를 늘려가고 있는 것이다. 368개라는 숫자도 아직 의견이 분분한 것도 있어서 제주도에서 이름을 칭하여 오름으로 인정한 개수일 뿐이다.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름은 뒷동네 산보다 작은 오름부터 마음 굳게 먹고, 허벅지에 힘주고 가야 하는 오름도 있다. 우리가 시작한 것은 무리하지 않을 작은 오름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쪽에는 작은 오름이 많다. 10분이면 올라갈 수 있는 오름을 오른 후, 오름 위에서 한 시간을 보냈다. 그 작은 오름을 올랐는데,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니, 이것을 왜 안 했나 싶었다. 작은 오름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구름이 흐른다. 저 멀리 한라산도 굳건하게 버텨주고 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시간을 보내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하늘이 온통 색색들로 채워지고 그 빛들이 거대해졌다. 오름 위에서는 가리는 것 없이 하늘이 보인다. 지평선 전까지는 모두 하늘이다. 이렇게 하늘을 온몸으로 맞이할 수 있다. 특히 따뜻한 노을빛 하늘을 맞으면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약속한 것처럼 매주 주말마다 가지는 못 했지만, 시간이 될 때마다 오름을 올랐다. 지금도 오르고 있다. 제주도를 떠나게 될 때까지 천천히 오름을 오르고 싶다. 모든 오름을 오르겠다는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올랐던 오름이 좋으면 또 올라도 좋기 때문이다.
녹산로는 벚꽃과 유채꽃길이 좋아 매년 봄마다 찾는 곳
종달리의 수국길
계절마다 피는 꽃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해소를 선사한다.
제주도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계절마다 제주도를 물들이는 꽃들 덕분이다. 유채꽃은 제주도 전체를 노랗게 물들이며 봄을 알리고, 왕벚꽃이 휘날리면 봄에게 인사하고, 수국이 색색들이 피면 여름을 알리는 것이고, 억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면 여름이 지나갔다는 의미이고, 동백꽃이 빨갛게 떨어지면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온다. 요즘같이 짧아진 봄, 가을에 아쉬워할 때 든 생각이 있다. 사계절 뚜렷하던 한국은 이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런 아쉬움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제주도의 계절 꽃이다. 계절이, 시간이 가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를 꽃들이 보내준다. 제주도의 꽃들은 꼭 어디를 가지 않아도 마을 곳곳에서 티를 낸다. 유채꽃은 당연히 제주 전 지역에서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다. 돌담 사이로 보이는 동백꽃도 계절을 알려준다. 마을을 걸어 다니다 보면 계절마다 색이 바뀌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도 더 많은 꽃을 보기 위해선 차를 타야 하지만, 10-20분만 차를 타고 가도 눈에 넘칠 만큼 보인다. 우리가 매년 꽃을 보기 위해 가는 곳은 왕벚꽃이 눈처럼 떨어지는 전농로, 유채꽃과 벚꽃이 말 그대로 꽃길을 만들어주는 녹산로, 종달리의 수국 해안도로, 겨울에 하얀 눈 내린 풍경 안에 빨간 동백꽃이 가득한 선흘리와 동백마을, 이런 곳들은 꽃을 보러 꼭 가는 곳이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재촉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안일하게 있지 말라고 말해주듯이 계절의 꽃들이 색을 바꿔가며 알려주는 것만 같다. 올해는 오일장에서 작은 동백나무를 하나 사 왔다. 이 동백나무를 잘 키워서 나중에 우리 집이 생겼을 때, 마당에 옮겨 싶다고 말하는 남편을 위해서 잘 키워봐야겠다.
에메랄드 빛을 내는 함덕 바다
에메랄드빛 바다는 카리브해 부럽지 않은 정신적인 휴가를 준다.
세상 어디든 다 가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나 아름다운 곳들은 가봤다. 일곱 빛깔을 낸다는 카리브해는 정말 아름답다. 유럽의 지중해도 물론 아름답다. 그 바다를 매일 볼 수 있다면, 그곳에 살고 싶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사는 이유일 수도 있다. 함덕 바다는 카리브해만큼이나 많은 빛깔을 가지고 있다. 낮은 바다가 백 미터는 넘게 펼쳐져 있고, 그 안에 깨끗한 모래가 있어서 아름다운 색을 뿜어 내는 것이다. 산호바다는 아니지만, 이런 빛깔을 내는 바다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광경에 놀라웠다. 지금은 매일 그 바다를 보며 산다.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바다, 저녁노을에 물드는 바다, 어둠이 내려도 빛이 나는 바다가 함덕 바다다. 우리는 답답한 일이 있을 때는 바다를 보러 간다. 옷을 대충 챙겨 입고 5분을 걸어 나가면 바다다. 그 바다 앞에서 파도소리에 걱정을 쓸려버리고, 바람을 크게 한숨 가득하게 담는다. 때로는 맥주 한 잔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바다에게 간다. 우리 이야기를 알고 있는 바다는 예전의 바다가 아니다. 우리를 품어준 우리의 바다가 된다. 이제는 어디를 가서 살더라도 서로에게 이런 바다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걸 안다. 어쩌면 이 바다는 우리에게 서로위로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일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노랫말처럼 '너는 나의 바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