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서 피어나는

by 싱긋

<따로 또 같이 쓰는 첫 문장>

모퉁이를 돌았더니 운동기구며 지압 길까지 잘 갖춰진 공원이다.


- 출처 <당신의 여행은 어느 쪽인가요> 31쪽




모퉁이를 돌았더니 운동기구며 지압 길까지 잘 갖춰진 공원이다.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커피를 들고 정처 없이 걷던 중이었다. 그러다 난데없이 등장한 공원 앞에서, 우리 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다가 요즘 유행하는 황톳길까지 촉촉하게 깔려 있었다. 비가 막 그친 뒤라 길은 질펀한 진흙이 되었고, 맨발을 디딜 용기는 없었지만 선물처럼 펼쳐진 풍경에 우리는 괜히 들떴다.




청량한 녹음이 야트막한 공원을 두르고 있었다. 숲 사이로 다채로운 새소리가 숨바꼭질하듯 들려왔고, 도심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 속에 숲내음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소녀처럼 다리를 살랑이며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공간이동을 한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 신기한 풍경, 우리가 함께라는 기쁨, 그날의 시원한 공기와 잔잔한 평화가 초록빛으로 남았을 뿐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기억들은 모두 장소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가 건축한 환경이 우리의 감정과 기억, 건강한 정서와 행복감의 형성에도 깊이 관여한다.”

— 『공간 혁명』, 세라 윌리엄스 골드헤이건



이 문장을 읽고 나서야, 그날 내가 공원에서 느낀 감정의 실마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간이 주는 힘을 안다. 감정이 고장 나거나 에너지가 바닥날 때, 자기존재감이 희미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숨이 쉬어지고, 내가 나다워지는 장소를 찾으면 회복되곤 한다. 나는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세상을 관찰하거나 예쁜 카페를 다녀오면 감정이 정리되고 새 힘이 난다.



감정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쾌적하고 정돈된 공간에 들어서면, 그곳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순식간에 기분이 전환된다. 관계 역시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 전망대처럼 높은 곳에서 데이트를 하면, 설렘의 원인이 풍경인지 사람인지 헷갈릴 만큼 심장이 뛰기도 한다. 친구와의 대화도, 카페에 있을 때와 숲속에 있을 때 그 깊이가 달라진다.



공간은 정체성 형성에도 깊이 관여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어디에 있는가'와 맞닿아 있다. 매일 아침 눈 뜨는 장소가 바뀐다면, 우리는 '나'라는 정체성을 단단히 세울 수 없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마음으로 하루를 열 수 있기에,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조각처럼 흩어진 기억의 뒤편을 공간이 감싸고 있다. 그 안에서 감정과 관계, 존재를 차곡차곡 쌓아 나를 이룬다. 그날, 그 공원에서 누린 싱그러운 감각들은 기억의 한 조각이 되어 나의 일부가 되었다. 왜 유독 그 순간이 특별하게 남았을까. 공간은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함께한 사람과 자연이 어떤 의미인지, 넌지시 나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다.



결국, 우리가 머무는 곳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공간이 속삭이는 숨결에 귀 기울인다면, 발길이 이끄는 길 끝에서 매일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무심히 지나치는 길모퉁이, 스치는 작은 들풀 하나에도 누군가와의 기억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모르던 내가 비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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