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글릭의 노벨문학상 첫 수상 소감은 이러하다.
미국에 이민온 헝가리 유대인의 후손 루이스 글릭. 2020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10대에 거식증을 심하게 앓아 7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았다. 학교도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했고 두번의 결혼 생활도 얼마가지 못했다. 50대 문턱 갑작스런 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와서 쓴 시가 바로 '애도'다.
글릭에게 시는 '삶을 잃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노력' 중 하나였다. 삶의 변주 속.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삶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삶이란 결국 생명 연장의 수단이 아니라 내가 놓아버린 그 순간 더이상 삶이라 부를 수 없으니까.
그녀의 시 '눈풀꽃'에 이렇게 적고있다.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그녀의 또 다른 시 '애도'는 살아있는 동안 한사람의 평가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던 이들이 그가 '다행히'죽자 그의 사람됨에 동의한다.
살아남은 이들은 서로 포옹하며 길에 서서 이야길 나누고 산들바람은 여인들의 스카프를 헝클어뜨린다.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운좋은 삶'이라고 자축하면서...
가장된 애도와 과장된 애도...,
누군가의 부고를 듣고 조문을 가기위해 검은 원피스를 고르면서도 화사한 스카프를 두르고 더 화사한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 앞에서서 자신을 바라보는것은 은연중 살아있음에 대한 우월감의 표현이 아닐까....누군가의 주죽음에서 나는 한 걸음 벗어나 있음에 안도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특권(?)처럼 여겨진다. 밋밋하고 단조롭지만 그래도 영속되는 것들. 삶은 정지되어 있지 않다. 움직인다. 꿈틀거린다.
또 다른 시 <야생 붓꽃>은 이러하다.
고통이 끝날 때쯤
문이 있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 당신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
기억나.
머리 위로, 소음, 소나무 가지들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희미한 태양이
건조한 들판 위로 깜박거렸다.
살아남는 것은 끔찍하다
의식이
어두운 땅에 묻혀있는 것처럼.
그리고 나서 끝났다: 당신이 두려워하고, 영혼이 되고 말할 수 없는 것,
갑자기 끝나는 것 같고, 뻣뻣한 땅이 약간 구부러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수풀더미를 뛰어다니는 새떼라 여겼다.
기억을 못하는 당신
다른 세계로부터 온 길
내가 다시 당신에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기 위해 돌아온다고:
내 삶의 한 가운데서
짙은 푸른색의, 커다란 분수가 있다
그림자 드리워졌다 짙푸른 바닷물에.
― 루이스 글릭 Louise Glück (미국, 1943― ) 2020년 노벨문학상
그녀의 시 3편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것은 '살아남은' ' 기억' ' 두려움' ''삶'....에 관한 언어들이다.
살아있는 우리, 살아있기에 할 수 있는 것들.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기억한다는 것.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모두 무언가를 찾기 위함이다. 그것이 목소리든, 목소리 외의 또다른 것이든....
우리가 살아있기에 누군가를 그리고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다. 바꿔말하면 기억할 수 있기에 살아있는 지도 모른다. 오늘의 햇살 아래 소환하는 모든 것들. 기억 언저리에 틈입하려 몸부림치는 것들. 무작정 끓어오르는 것들. 그냥 그저 그런 것들..... 모든 기억들을 만드는 시간들이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루이스 글릭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리는 것 같다.
그녀의 첫 수상 소감처럼
일단 아침 커피를 마셔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