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이 하늘에 금을 내고 있는 2월 끝자락... 시집을 읽으며
이곳은 뜨거운 사막.
놀랍지도 놀라울 것도 없는 날들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를 모르고.....
백애송 시인의 신작 시집 『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
회색 도시에서 회색 얼굴로 살아가는 이들. 마스크는 회색 표정을 은폐하기에 최선의 도구다. 놀랍지도 놀라울 것도 없는 날들이지만 뉴스에선 날마다 놀라운 일(?)들만 쏟아진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지나가는 당신도 나를 모르고 익명의 얼굴들이 스쳐간다.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서로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 빚진 것도 상처 준 일도 없으면서 자꾸만 시선을 피하게 되는 삶.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끝까지 익명으로 남기를 바라는 사람들....
익명의 우리는 삶의 어떤 페이지에 멈춰있을까?
< 어떤 페이지 >.
...
속없는 나무와
철없는 국화가
틈을 모르고
함부로 들떠 있을 때
....
어떤 페이지에서
마음, 이라고 읽으려다
그 사람이 욌다고 착각했다
견딘다는 것은
체념과 또 다른 체념을
몸에 익히는 것
기대와 체념을 반복하는 것
혼자 중얼거리며 위로했다.
- 어떤 페이지 발췌 -
삶의 페이지에서 행간을 읽는다. 자꾸만 잘못 읽는다, 망고를 사망으로, 기대를 대기로 마음을 그 사람이 왔다로.... 삶은 자꾸만 잘못 읽고 싶은 현실 같은 것이다. 기대와 체념의 반복 사이 결국 중얼거림만 남는다.
또 다른 시 < 별책부록 >을 살펴보면
<별책 부록>
중요한 순간은 미끄러져 나간다
..... 중략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기대는
서로의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뜸만 들이다 사그라졌다
(...) 열정이 없어도 이루어지는 별책 부록 속 세상. / 발췌
책 속의 중요한 것들은 날 비켜가고,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기대는 허망하게 사라진다. 우리는 모두 ‘굳이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는’ ‘열정이 없어도 이루어지는’ 별책 부록 속 세상에 있다. 별책부록은 어쩌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리는 거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끝까지 책의 본문에는 다가가 보지도 못하고 우리 삶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채로 별책 부록 어디에선가 그렇게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지....
또 다른 시 <역주행>을 살펴보면
<역주행>
내가 잃어버린 것은
나를 비껴간 곳곳으로 흘러갔다
... 중략...
관상용 어항 앞에서
잃어버린 길을 그려 본다
가장 멀리 떨어진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구피는 꼬리지느러미로
쉼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간다
나인 듯 아닌 듯
나만 없는 채로
이곳은
증명할 수 없는 것들로 넘쳐나는
거대한 물속
- 역주행 발췌-
관상용 어항 속 구피는 길을 어떻게 찾아갈까. 우리는 구피의 길을 알지 못한다. 구피가 어디서 어디로 헤엄쳐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구피는 쉼 없이 앞을 향해 간다. 어항의 막다른 어디선가 다시 재빨리 방향을 틀더라도 구피에게 그것은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
구피를 바라보는 나는 물 밖이 아닌 물속에 있다. 증명할 수 없는 것들로 넘쳐나는 것들 사이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물 밖에도 물속에도 나는 부재한다. 허방스러운 역주행 중이다.
< 눈물의 이동 경로 >
단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눈물을 닦을 수 있을까
부엌에서 사과나무는 자라고
흑점은 날마다 달라지고 있다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까다로울 수 없다
까탈은 끝을 보지 못한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
눈물을 흘려도 하루가 지나가고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하루는 지나간다
-중략-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는 가는 것
눈물에는 악착같은 이동경로가 있을까
- 눈물의 이동 경로 발췌 -
어떤 하루 눈물이 필요한 날이 있다. 그 눈물이 극한의 눈물일 경우 우리는 까탈을 부릴 수 없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흘리지 않는 것이(참는 것이) 어느 것이 더 좋은 삶인지 말할 수 없다. 시인은 ‘그래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받아들임’과 ‘불구하고’의 언어로 하루를 정의한다. 눈물의 악착같은 이동 경로가 있다면,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그 눈물의 이동경로를 따라 함께 흘러 내려갈 것인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아주 작은 단위인 하루는 마냥 흘러간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
이 긴장은 참 쓸쓸해요
미리 준비했던 표현은 오늘도 하지 못했어요
했어야 했던 말 피했어야 했던 말
돌아서면 생각이 나요
내가 한 이야기가 옳은지
기억에 없어요
서로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봐요
뒷모습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속삭여요
다음에는 더 아름다운 곳에서
오늘처럼 예고 없이 만나자고요
우리는 어디까지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전문 -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여야 한다. 서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자리'(밥벌이)를 얻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어딘가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있다. 뒷모습만으로 누구인지를 알 수 있지만 거기 그곳에서 우리는 모르는 사이여야 한다. 모른 척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다.
시인은 다음에는 마주 지치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더 아름다운 곳에서 오늘처럼 예고 없이 만나기를 소망한다. ‘더 아름다운 곳 ’ 저마다 아름다운 곳의 정의는 다르겠지만 시인과 누군가가 마주쳐도 좋을 ‘더 아름다운 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시인은 시집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에서 밥벌이와 눈물과 삶의 역주행과 별책부록 같은 현실 그리고 같은 쿠키 판에 드러누워 같은 모양으로 구워진 아무나 같은 우리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스케치한다.
그리고 소망한다.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길. 설령 서로 모르는 사이여야 한다고 하여도 지금 여기보다는 ‘더 아름다운 곳’에서 마주치기를.../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