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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고 섬세하고 조화로우며 산뜻한 쓴맛을 위하여

나는 날마다 무언가를 쓴다. 그리고 소모된다.

어떤 의식 ritual을 집행하는 사람들.. 익숙함은 타성이 된다. 의식 ritual이란 종교적인 것만큼이나 신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루를 시작하는 것... 특별한 의식 없이 시작한다. 습관대로 밥을 먹고 습관대로 커피를 마시고... 습관대로 도로를 달리고 습관대로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습관대로 수업하고 습관대로 진행되는 일상... 습관대로 살아간다.


습관대로 커피를 마시기 위해 더치커피를 고른다

상큼한 꽃 향기와 입안에서 느껴지는 산뜻한 산미, 달콤함, 화사함이 매력적인 커피...'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에 대한 설명이다. 진하고 풍부하게 퍼지는 카카 오향과 구수하고 섬세하면서 달콤하면서 매력적인 커피...'로브스타 우간다' 커피의 특징적인 쌉쌀한 맛과 단맛, 신맛, 쓴맛을 모두 조화롭게 가지고 있는 완벽한 커피의 대명사... 이것은 '케냐 AA'에 대한 설명이고, 견과류에서 느껴지는 고소함과 진한 초콜릿 향과 단맛이 특징, 부드러운 신맛을 가진 마일드 커피의 대명사 '콜롬비아 수프리모'..... '브라질 산토스' 등등...

우간다, 콜롬비아, 케냐, 에티오피아... 말들이 현란하다. 네 가지를 모두 한 잔에 섞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달콤하고 화사하고 섬세하고 구수하고 매력적이며 진하고 풍부하며 산뜻하고 고소하고 조화로우며 부드럽고 상큼하고 완벽한 맛'이 될까? 문득 그 생각을 한다.


커피 봉투의 현란한 문구.... 문장이 커피 맛을 온전히 대변할 수 있을까?

미사여구 속... 그 말이 그 말처럼 느껴진다. 봉투를 뜯어 커피잔에 부으면서 일부러 혀끝에 느껴지는 낱낱의 맛을 감별해보려고도 해본다. 절대미각을 지니지 않아서 인지... 그 맛이 그 맛이다.

혀 끝에 감지되는 것은 오직 쓴맛뿐...

내가 커피를 마시는 것은 쓴맛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섬세한 쓴맛, 상큼한 쓴맛, 매력적인 쓴맛, 풍부한 쓴맛, 완벽한 쓴맛, 조화로운 쓴맛, 진한 쓴맛..... 커피가 주는 수많은 쓴맛 중 완벽한 쓴맛과 진한 쓴맛을 선호한다..........


사람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낱낱의 사람을 포장하여 어딘가에 진열해두고... 상큼하고 섬세하며 조화롭고 진하고 달콤하며 완벽하고 화사하고 매력적인...

사람을 광고 카피처럼 한 마디로 압축하여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은 모순 형용의 존재이다.

완벽하지만 불완전하며, 섬세하지만 무덤덤하고, 달콤하지만 쌉쌀하거나 씁쓸하고, 화사하면서 칙칙한, 따뜻하지만 차가운, 냉소적이지만 다정한.... 태생적으로 사람에겐 이중적인 면이 존재한다.

이중적인 것들 사이........ 더치커피처럼 그날그날 우리는 소모된다.

습관대로 소모되고 습관대로 탈진하고... 가끔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한 건지도 모른 채 일을 하고 그렇게 습관대로 하루를 소모하고 스스로 소모된다...


'쓰다'는 동사는 매력적이다. 글을 쓰다의 '쓰다'와 커피맛은 쓰다도 '쓰다'

'씀'이라는 매력적인 단어를 타이핑하고선 한참 동안 바라본다. 씀.....

쓴 커피를 마시며 무언가를 쓰는 일.... 나는 쓴 커피를 소비하고.. 무언가를 쓰며 소비된다.

쓰는 일을 즐거운 일이기도 하고 즐겁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모순 형용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쓰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 안의 무언가가 강렬하게 끓어오르고 끓어오르다가 혼자 식어버리고 다시 식었다가 끓어오른다.


소모되기 위해 소비되기 위해.... 내 손 끝에서 무작정 태어나는 소모적인 글들을 또다시 바라본다.

완벽하고 섬세하고 진하고 부드러우며 조화롭고 달콤하고 매력적인 커피맛이란 존재 불가능하듯 내가 쓰는 글도 완벽하고 섬세하고 진하고 부드러우며 조화롭고 달콤하고 매력적인 글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쓰다 보면........... 완벽한 쓴맛을 내는........ 글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적당히 쓴 맛의 커피를 마시며 나는 적당히 쓴 글을 쓰고 있다. 키보드 앞에 소비되고 있다.

언젠가를 위해................ 완벽하고 섬세하고 조화로우며 진한.... 그런 날을 위해 '지금'을 습관처럼 소비하고 있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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